2025.11.24 21:03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 동산 어딘가에 올리브기름을 짜는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께서 즐겨 기도하시던 이곳에서 이제 주님은 마지막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올리브 열매가 틀 속에 들어가 맑은 기름으로 짜내어지듯이 이제 주님은 마지막 메시야로서의 그 사명을 완성하시기 위해 혼신의 힘을 짜내어 기도하시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열심을 내셨던 기도를 모순되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고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게으르고 나태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그토록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일이 아닌 기도에 열심을 내시면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는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마지막 사역은 기도이셨습니다. 단순한 형식적 기도가 아니라 흐르는 땀 방울이 핏 방울이 되기까지 하신 기도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셨던 간절한 기도이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주님은 이제 기도하시는 장소로 이동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그곳에 앉아서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기도 시간에 제자들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주님을 수행하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 만을 데리고 주님께서는 기도의 장소로 향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으셨음을 곧 알게 됩니다.
이제 홀로 기도를 시작하시는 주님의 감정에 대해서 성경은 주께서 두려워하시고 슬퍼하기 시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히 놀라시며’, 이 단어가 갖는 의미는 감정이 매우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것을 뜻합니다. ‘슬퍼하사’의 의미는 깊은 슬픔에 잠긴 것을 뜻합니다. 마지막 기도를 시작하시는 주님의 마음과 감정은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으셨습니다. 주님을 이토록 두려움과 슬픔에 잠기시게 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제 처음으로 겪으시게 될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매우 슬퍼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인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주님의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성경은 여과 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토록 두려워하시고 슬퍼하신 일은 다름 아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주님 자신이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 때문이었고, 우리 각 사람의 모든 죄 짐을 지시는 일로 인해서 주님은 그런 감정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주께서는 그리 어렵지 않고, 매우 이 일을 쉽고 간단하게 여기시면서 대속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완전하신 진노와 처절하게 버림을 받게 되시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으신 그 공의 앞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감당하셔야 하는 속죄의 사명으로 인해 주님은 지금 매우 놀라시고 두려워하셨고 깊이 슬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어지지 않는 죄성 때문에,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슬퍼하지만 거룩하시고 순결하시며 죄와는 무관하신 주님께서는 그 낯선 죄책을 감당하시기 위해 그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감당하실 것을 생각하시며 이를 매우 두려워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저주가 그 아들에게 임하게 되는 이 일에 대해서 인성을 가지신 주님의 솔직한 감정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들여다보게 됩니다. 죄가 없는 분, 징벌이 무엇인지 전혀 경험하지 않으신 순결한 분으로서 주님은 이제 주님께서 감당하셔야 할 모든 대속의 대가에 대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한 버림을 받게 되시는 이 일에 대해서 지금 매우 놀라고 슬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완전히 순결하신 그 본성 안에서 죄의 대가를 감당하셔야 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께 얼마나 큰 고통이며 슬픔이셨는지 우리는 짐작조차도 되지 않습니다만 성경은 이 같은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고뇌에 찬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느끼시는 고통과 두려움의 크기가 얼마나 크셨는지를 보십시오. 누가복음 22장 4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주님께 힘을 더하게 하셨다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속의 위대하신 사명을 감당하시는 일이 메시야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이셨는지를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주께서 당하신 그 괴로움의 깊이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신 주님은 누가복음 22장 40절을 보면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주께서 늘 강조해 오셨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도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시험과 유혹에 들지 않기를 매일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유혹과 시험에 약한 존재들이고 쉬 넘어지는 존재들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험과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은 오직 기도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가 멀어질 때 우리의 신앙도 식어지고 신앙에 대한 모든 열정도 사그라들기 마련입니다. 믿음이 식어지고 모든 영적으로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도가 소멸되거나 지극히 형식적이고 매우 미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서 영적인 침체가 오게 되고 영적으로 힘을 잃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기도를 거의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나 다름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어도 그의 영혼은 여전히 마귀에게 장악 당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언제나 쉽게 패배하고 항상 타협하며 핑계와 변명으로 가득할 뿐인, 항상 시험에 들어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게으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의 넘어짐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잘난 체하며 자신을 과신하는 베드로, 어머니를 앞세워서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예수께 청탁했던 야고보 요한, 주님께서는 왜 마지막 기도의 자리에 이 세 제자를 데리고 가신 것일까요.. 여기에는 주님의 깊은 뜻과 그들을 향하신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자기 자신에 관해서 무지한 존재들이며 그들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에 지나지 않은 지를, 주님은 한시도 깨어 기도하지 못하던 그들 자신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을 스스로 마주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그 연약함을 올바로 보고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시면서 이 세 명의 가장 문제의 제자들을 데리고 주님은 기도의 처소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교훈하시고 그들이 겸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챙기시면서 마지막 대속의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신 주님께서는 스스로도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메시야께서도 그렇게 간절히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