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1 22:08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또다시 흩어 보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도 주님께서는 서둘러 무리들을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의 등을 떠밀어 속히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가장 극적인 이적을 가장 많은 무리들 앞에서 보이신 이 영광스러운 장소에서 주님께서는 조금도 더 지체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주께서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서둘러 그 흔적을 지우시고 사람들이 이곳에 더 머물러 방금 일어났던 일의 여운을 만끽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일은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본질적인 목적과 깊은 관련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그들의 기억에 각인되어 메시야에 대해서 그릇된 오해를 갖게 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극도로 꺼리셨기에 사람들을 집으로 속히 돌려보내셨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시는 이러한 일을 행하시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양식을 무제한으로 만들어 내시는 이같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고도 그들이 먹은 빵과 생선이 채 소화도 되기 전에 집으로 돌려보내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영혼을 구하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육신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자 함이 궁극의 목적이 아니셨습니다. 뭇사람들의 질병과 장애의 고통과 괴로움을 한없이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셨지만 주님께서 정작 불쌍히 여기신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죄인들의 영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는 동안 우리의 육신의 잘 됨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영혼에 집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복음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수많은 자들의 굶주림을 이와 같은 놀라운 이적으로 해결하셨음에도 이 일로 인해서 주님은 어떤 칭송을 받는 것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배를 채우신 이후에 속히 그들을 돌려보내시기에 급급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주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간곡하게 주고자 하시는 바는 바로 진리의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형통한 것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게 되며 우리의 구주와 영원토록 함께 하게 됨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정말 좋은 것은 이 땅에서 부귀와 영화를 얻는 것입니까.. 주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까..
여전히 복음이 무엇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고 있는지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믿음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속히 이 놀라운 이적을 행한 곳을 떠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 아래서 고통 당하는 모든 모습들에 대해서 주님은 한없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그들을 모두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고치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그들의 오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주님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이 진리를 올바로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의 목적과 동기도 복음이 말씀하고 있는 것에 오롯이 초점이 맞추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게 하심으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진리는 우리에게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대하는 모든 자들은 바로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 느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느니, 인간들을 사랑하고 사회의 약자들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이 신자와 교회의 사명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 속에서 이러한 부분들은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과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옳다면 우리의 선조들이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작성한 모든 신앙 고백서와 문답서에서 이 부분을 더 많이 중요하게 다루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사명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이것을 강조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교리는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11장 36절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빌립보서 1장 10~11절은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나 같은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자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신 이유가 고작 나의 행복을 위해서 일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와 주장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의 나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서 주께서 갈보리 언덕을 피로 물들이시며 그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일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정치와 이념을 바꾸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그러면 주님은 로마를 단번에 정복하고 모든 유대주의자들을 다 한 줌의 재가 되게 하셨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가난한 자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한 더 많은 제도와 법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로 가셔야 했습니다. 세상을 바꾸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모든 교훈과 말씀들을 통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그것 만을 위해서 존재하도록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 각자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어떤 시대에 태어났든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시련과 아픔이 있든지, 오직 우리에게 주신 임마누엘의 약속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함을 진리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우리가 바라보고 싶은 시선으로 바라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