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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과연 주님께 사탄이라고까지 불리워질 만큼 악한 죄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이 위대한 일을 훼방하는 자가 사탄입니다. 예수께서 사탄이라고까지 말씀하시며 베드로가 말한 것에 대해서 반응하신 이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을 설득해서 십자가를 포기하도록 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가시려 하는 길이 자신이 생각한 평탄하고 화려한 길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 괴로웠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신을 위해 깨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실 때 베드로는 열렬히 주님을 위해 기도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위급한 일이 있고 우리의 팔을 잡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우리의 등을 떠밀어도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고집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모든 일들이 진행되어야 하고 그것에 안주하려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지 아니하고의 원어적인 의미는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이 베드로는 지극히 자기의 바람과 인간적인 생각으로만 주님께 이같이 말한 것을 주님께서는 매우 강도 높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하셨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대하시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방금 전에 주님은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사명의 앞길을 가로막는 동일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사탄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그 같은 행동의 근거가 되는 인간적인 생각에 대해서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생각이라는 것을 일갈하신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극적으로 태도를 돌변하셔서 엄히 그를 꾸짖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한없이 부드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인자하시다 가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 죄성 앞에서는 매우 단호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공의를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주의 종교지도자들을 긍휼히 여기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 일을 극도로 방해하는 자들이었기에 언제나 그들에 대해서는 차갑게 대하셨습니다. 심지어 저주까지 하셨습니다. 때로는 상종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자, 주님의 관점에서는 모두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일은 결코 교회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행하고자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것은 가룟 유다처럼 사탄의 종,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한 선한 양심이 없다면 위기의 순간에서 우리는 언제든 우리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코람데오의 정신이 없다면,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불꽃같으신 시선을 의식함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위급함을 합리화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결정들을 할 것이고 주저 없이 그것을 결행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연약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이익을 당하고 위험에 노출되고 심지어 재산과 생명을 명예를 다 잃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언제나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 이 마지막 때에 그 믿음을 갖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이 믿음으로 진정으로 나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믿음의 결단을, 그 희생의 자리를, 그 핍박과 고난의 자리로 내려가겠습니까.. 우리에게 지금 그 믿음이 준비되어 있나요.. 우리에게 그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우리의 생명을 가만히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 같은 주님의 반응에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단호함을 보십시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에 있어서 이토록 단호해야 하는지를 주님의 이 같은 태도와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인본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고 교회와 성도를 위하는 것 같으나 그 생각이 결론은 지극히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탄의 생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하나님을 위한 결단보다 자기의 체면과 자존심, 자기의 높아짐, 자기의 영광과 이 땅에서의 번영과 안정에, 나와 나의 가족의 행복에만 더 마음이 가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이 아니라 사탄에게 비롯된 악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왜 이토록 베드로의 말에 진노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고자 하시는 일은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위해서 그토록 고통스럽고 고독한 가운데서 자신을 버리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모든 일들을 주께서 감당하시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연민과 두려움과 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하면 우리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과 섭리와 뜻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자기들의 일만을, 그들이 살아가야 할 일들에 대해서만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러한 그의 안일한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적극적인 만류의 행위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더 잘 하기보다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 옳은 것인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인가를 따지기 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고 진리가 말씀하는 바를 우리가 지켜 따르는 것인지에 더 강조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본주의 신앙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더 높이는 참된 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 비참하신 죽음으로 영원한 대속을 이루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있음을 예고해 주신 나의 주님을 위해서, 그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부디 우리의 믿음은 내가 중심인지, 오직 그리스도께서 중심이신지를 이 시간 우리의 양심에 질문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계획과 결정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인정하실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넓은 길로 행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가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그 궁극의 목적을 알고 깨달아 그 좁은 길로 가려는 이들은 결코 다수가 아닙니다. 결국,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에 의해서 모두 걸러지고 구별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을 높이는 교회는 지천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영광만을, 십자가만을 높이는 교회는 결코 흔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인본주의는, 사람을 언제나 먼저 생각하는 신앙은 결코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을 가장한 불신앙입니다 명목상의 믿음일 뿐입니다. 이것은 주의 진노를 가져올 매우 그릇된 죄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연약한 인간들을 붙들고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그 좁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얼마든지 해 볼 만한 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죄인들이 오늘도 붙드시는 주의 은혜가 아니라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길을 가도록 우리를 독려합니다. 그것이 참 믿음의 길이며 참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 때문입니다.

 

신본주의 신앙, 그것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편안하게 갈 수 있는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만을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무엇을 여러분은 더 소중하게 여기며 오늘도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그래서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사랑했던 모든 참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한결같이 열렬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오직 그런 신본주의의 절대적 믿음을 가진 자들 만이 모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그 빛나는 믿음을 지켜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주께서 원하시는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져서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이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깨어 있는 신본주의의 참된 신앙을 끝까지 올바로 지켜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가장 우선이 되는 그 귀한 믿음으로 우리 모두를 무장시켜 주시기를 다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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