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7 08:22
주께서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비밀을 말씀하신 이유는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함으로 죄 사함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 심판으로 이어지는 이 위대한 구속의 역사의 드라마가 모두에게 다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성경은 거듭 강조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보고 들어도 그 의미를 도무지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성경의 진리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회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눈과 귀를 막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불신자에게는, 구원으로부터 유기된 자들에게는 결코 성경의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함으로 인해서 결국 심판을 받고자 하심이 주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1~12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복음이 모두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까.. 성경은 결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자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는 일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복음에 대해서 많이 들었음에도 돌이켜 회개하지 않고 그의 삶이 그리스도를 향하지 않으며 복음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이러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그는 깊이 우려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함에 대해서, 그 쉬운 비유의 말씀도 이해되지 않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가 들리지 않아 졸고 있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한번 육신의 피곤을 이길 수 없어 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설교의 시간을 졸음과 잡념을 떠올리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부디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영혼에 깊은 병이 들었던지 아니면 그에게 들을 귀가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하게 본다면 회개할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 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이 진리의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으며 자신의 영혼에 전혀 와닿지 않아 돌이켜 회개하거나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있는, 수 년째 수십 년째 신앙이 그 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을 여러분은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정으로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부디 이러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부디 진리가 보이고 들려지기를 탄식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불신자는 죽을 때까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 위해 힘쓰라고 해도 이 모든 말들을 농담처럼 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더 깊고 심오한 진리를 배우고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재앙처럼 여기는 것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이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두려운 증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만 있을 때, 모든 무리들이 다 돌아갔을 때 제자는 비유의 의미를 주께 물었습니다. 그 많던 무리들은 이 비유의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진리는 그 진리를 반드시 알아야 할 자들에게만 전해집니다. 모두가 떠난 후에 비로소 봉인이 풀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교회를 도망치듯 떠났음에도 남아 있는 자들, 진리를 더 듣고자 배우고자 하는 자들, 그들에게 비밀이 열려집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토록 진리를 배울 수 있었던 모든 기회들을 비웃은 자들이 결국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날이 기필코 임하게 될 것입니다. 비 오는 수요일이나 눈이 많이 오는 매우 추운 금요일에 예배당을 향한 누군가는 자신을 송두리째 깨우는 생애적인 복음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를 듣는 은밀한 자리에,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떠나간 자리에, 소수만이 모여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자리에 여러분은 자주 나아가고 있습니까..
외인에게는 비유로만 주셨습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알아듣지 못하도록, 돌이켜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복음이 갖는 특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비밀입니다. 오직 들을 수 있는 자에게만, 그것이 허락된 자들에게만 들리고 설명되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와 영혼들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밭입니다. 예수가 돌려보낸 자들, 비유만 듣고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간 자들 그들은 택자가 아닙니다. 그저 주일의 한 시간 예배를 간신히 견디고 등을 돌리고 빠르게 자기의 삶으로, 일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가치를 향해서 다시 되돌아가는 버리는 자들은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단지 지식으로 알고 있는 자들일 뿐입니다. 신앙은 당신의 삶에 필요한 보험 정도나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영생을 얻느냐 영벌에 처해지느냐의 영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목회를 할수록 깨닫게 되는 분명한 한 가지는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을, 진리를 듣고자 하지 않는 영혼들이 교회 안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어이 이 선명한 진리를 듣기 싫어 뛰쳐나가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깊은 복음을, 더욱 분명한 진리를 그들은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어린아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믿음의 자리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수박 겉 핥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는 비유이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입니다.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 오늘도 교회 있으면서도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가 진실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복음이 잘 들리지 않고 교리는 하나도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어려운 성경과 교리와 신학이 바로 불택자들에게는 걸리는 돌,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싫어합니다. 고개를 젓습니다. 무관심합니다. 비유를 도무지 알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결국 영벌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구원받는 자가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적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받을 자의 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