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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목적과 뜻을 따라서 공생애의 모든 시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그 어떤 일로도 불필요하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하루가 얼마나 치열하고 고단하셨는지는 복음서의 기록을 깊이 들여다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 나아가서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대속의 그 위대한 사명을 완성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이 한가지 뜻과 목적을 위한 생애를 이 땅에서 살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으시거나 힘들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셨고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셨을 때 어떤 대우를 받게 되실지를 이미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으시려 하고 보람을 느끼려 하셨다면 주께서는 결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이것을 믿고 받아들인 자들은 매우 적은 무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독하신 가운데서 모든 사명을 이루어 나아가셨습니다. 누구도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깊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으셨습니다. 주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메시야로서 받으셔야 할 모든 합당한 대우를 결코 원치 않으시고 도리어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그들의 무례한 도전과 멸시와 조롱과 비난을 받으시는 일에 익숙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절박하게 주님을 찾는 육신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자들의 틈에서 모든 공생애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누구보다도 뜨겁고 간절히 사랑했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사도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고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끼같이 되었다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그리고 모든 만물로부터 거절되고 거부되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의미입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가치를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셨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사도들도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던 그 외로운 길을, 그 힘겨운 사명의 길을 기꺼이 이 땅에서 감당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성도의 삶은 이 땅에 주목을 받고 높임과 영광을 받는 삶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을 감추고 지워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를 통해서 존귀케 되는 삶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삶으로 비춰지고 나의 모습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나의 인생의 모든 여정을 어떻게 평가해 주시는 지가 중요합니다.

 

마가는 분문에서 유대주의자들과 갈등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잠시 뒤로하고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여겨지셨고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셨으며 유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열정과 집착을 보이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유대주의를 공격하고 계셨습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셨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의 타락하고 변질된 유대주의, 율법주의를 낡은 옷, 그리고 낡은 가죽 부대에 비유하시며 결코 이것과 앞으로 예수께서 전하시는 복음과 새 시대, 새 언약은 결코 함께 갈 수 없음을 천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메시지는 유대주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와 증오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만든 수많은 규례들을 모두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주님은 점점 더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셨습니다. 옛 언약과 모든 율법은 죄인들이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음의 그 뚜렷한 한계를 보여줍니다. 성전은 유대주의의 산물입니다. 성전은 옛 언약의 상징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를 통해서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시키신 것은 더 이상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제사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는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파괴로 사실상 유대주의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도록 하나님께서는 섭리하셨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제사도 모두 중지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이스라엘은 아직도 유대주의를 버리지 않고 다시 시온산에 세 번째 성전을 짓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강림하심으로 사실상 유대교는 끝이 난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 그들의 모든 가식과 위선이 모두 드러나게 되었고 오늘의 이스라엘에서 보듯이 이제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라고 보기에는 이미 국민들의 절반이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세속주의자들이 되어 버린 부패하고 타락한 작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는 그렇게 사실상 역사 속에서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 지식적으로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이사야 53장을 인정하지 않고 저들의 성경에는 이사야 53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은 필요로 했지만 주님이 전하시는 새로운 언약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유대주의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를 통해서 자신들의 간절한 필요가 채워지는 것 만을 희망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나 갈라디아서는 그렇게 유대주의적인 사고와 신앙의 틀에 묶여 있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독보적 탁월성을 강조하며 결코 유대주의로 다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우리에게도 이 같은 죄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사상과 청교도의 사상을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하고 그 탁월성을 이해하면서도 과거 우리가 믿어왔던 더 편안하고 자유롭고 기복적인 신앙의 방식과 인본주의적인 사고의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찾았고 간절히 주님을 좇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모든 문제들, 질병들을 비롯해서 귀신들림과 그들의 먹을 것을 해결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질병과 죽음의 문제,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결사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여겼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이 시대에 기독교를 결국 자신들의 문제 해결과 현세에서의 안위와 형통과 성공의 목적만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절대다수의 교인들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현실적인 문제 해결만을 위해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어떤 다른 목적과 조건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그 진정한 믿음을 갖기 위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이유와 동기와 목적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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