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0 08:40
주께서는 갈릴리 호숫가로 제자들과 함께 이동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큰 무리가 주님을 좇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몰려온 무리들은 가버나움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부 지방인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동쪽 지방인 요단강 건너편, 그리고 북서쪽 지역인 두로와 시돈 등 사방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모여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 유대 사회와 이방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좇은 이유는 그의 하신 큰 일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들었다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고치신 병자들에 대한 이야기 귀신들을 쫓으신 이야기 등과 같은 주께서 행하신 기적과 이적에 관한 소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구름 떼처럼 몰려온 이유는 바로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대주의 종교지도자들이 모두 힘을 모아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염려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 대해서 무엇을 들어왔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 이곳에 나아 오신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지식이, 혹은 어떤 생애적인 그리스도와의 경험이 오늘 우리를 이곳으로 모이게 한 이유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어떤 필요가 예수를 찾게 만든 것입니까.. 그 필요는 우리의 영적인 목마름 때문입니까, 아니면 현세적인 것이고 육체적인 것이며 물질적인 것들입니까..
제자들과 함께 잠시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뒤로 물러가 계신 주님을 향해서 사람들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오직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득달같이 주께로 모여왔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좇아왔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교회로 나아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필요로 합니다.
마가복음 1장 33절에,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45절에,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3장 7절에, ‘..큰 무리가 좇으며..’ 8절에,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예루살렘 이두매, 요단강 건너편, 두로 시돈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방의 지역에서도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병 낫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 주실 구세주로 믿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필요를 해결하는 일을 위해 예수께로 나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필요가 채워졌을 때 혹은 그 기대가 더 이상 소용없게 되었을 때, 그들이 모두 어떤 자들로 돌변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돌변하게 되었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영원한 지옥의 영벌에 이르게 된 아무런 소망 없는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 위해서 대속해 주신 하나님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잊을 길이 없는 감사의 마음과 자발적 순종을 통해서 이제 나의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고자 매일 나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신앙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병을 고치시는 의사이며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전능하신 해결사 정도로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신앙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런 가식적인 믿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성경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깊이 기도하지 않으며 주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여전히 분주한 자기의 삶에 얽매여 있는 육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한 시대에 살았고 주께서 전하시는 복음을 직접 들었어도 유대주의를 떠나지 않은 채 주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필요만을 채우고 자신들의 문제의 해결만을 바라던 모든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원과 무관한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지한 마음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기 위함입니다. 그 육체의 고통과 괴로움과 결핍을 통해서 참된 영혼의 필요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아서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나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 되심을 믿고 고백하게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예수를 찾음으로 요행히 문제가 해결되었어도 예수를 믿지 않게 되면 그는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예수를 모른다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한 삶으로 빠르게 회귀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삶의 중심축이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주인이 되심을 믿고 고백하며 이를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구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고난을 통해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수 없는 말씀의 경고를 통해서 돌아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결국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게 된다면 더 큰 고난이 다시 당신의 영혼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포기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현실적인 나의 필요만을 채우고 주님을 생애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결국 어느 시점엔가 배도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죽이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깊이 접붙여져야 합니다.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오늘도 당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계실 때 주 앞으로 나아가 인생의 문제만을 해결 받기를 구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음으로 당신의 영혼의 문제가, 영원의 문제, 내세의 문제가 해결되는 궁극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