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2 09:30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형벌을 당한 자들, 죄 아래서 고통하며 근심하며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용서하며 그 모든 죄의 결과로 인한 채찍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임을 상징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핍근히 함이더라’라는 말의 의미는 ‘밀어닥치다’ 혹은 ‘달려들다’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무리들에게서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예의와 정중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서로 예수의 몸을 만지기 위해서 밀고 당기며 무례할 정도로 예수님을 힘들게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 몸을 던지기도 하고 달려들기도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입니다.
이기심에 눈이 먼 인간들의 이 추악함을 보십시오. 마치 먹잇감을 노리듯이, 자기들이 노리는 것을 얻기 위해 동물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당시 군중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수모를 종종 당하셔야 했습니다. 주께서 전하시는 복음에는 결코 그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자들이 자신들의 육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광적으로 집착하고 그것을 얻고 말겠다는 탐욕을 표현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영적인 가치에 이렇게 마음을 쏟고 열정을 쏟는다면 이 일들은 얼마나 귀한 일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윤택하게 하며 하나님과 놀라운 친밀함을 맛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오늘도 주님을 좇는 이유, 교회로 나아온 목적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군중들의 영적인 무지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린 채찍과 징벌로서의 병이라면 이 병을 고치시는 분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실까라고 유추해 보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의 사고는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어도 그 목적이 오직 현세 기복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볼 때 이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많은 병자들이 주님을 간절히 만지고자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한 번씩 만이라도 손으로 만진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렇게 모두 무지하고 어리석게도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주님께 병 낫기를 원했습니다. 병 나음을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고 기어코 주님을 만져야 자신들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내 방식, 내 주관, 내 생각과 판단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언제나 내 생각과 방식과 내가 생각하는 선에서 하나님을 신앙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올바로 기다리거나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지를 깊이 생각지 못합니다. 무조건 낫게 해 주십시오, 해결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뜻대로 되게 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의해서 우리는 존재하며 그 뜻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이 내 고집대로 내 생각대로 밀어붙이기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달려들면 하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다는 식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그런 유의 믿음을 성경은 어디에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을 만지기 위해 달려드는 수많은 무리들의 이 모든 수모들을 감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아직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임을 아셨고 주님의 긍휼이 그들의 무례함보다 더 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병을 치료하는 치유자가 아니라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대속주이심을 알지 못하는 군중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고치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자녀가 어려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 그 부모가 사랑으로 그 모든 실수와 연약과 무례를 용납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의 영혼을 고치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들의 육체까지도 능히 고치심으로 끝없는 긍휼과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만이 신앙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고난은 이 문제가 해결됨으로 자연히 소멸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궁극의 뜻과 섭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