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9 07:46
누가 우리를 친구로 여겨 주는가의 문제는 우리에게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매우 즐거운 일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친구’라는 명칭을 사용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26장 50절에서는 자신을 팔아넘기는 유다에 대해서까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배신자 유다에게까지 주님은 ‘친구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넘기는, 배은망덕한 제자 도저히 친구라 부를 수 없는 유다조차도 주님은 친구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할 것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교훈하셨던 주님께서는 이제 주께서 친구의 개념을 정의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제 자신의 친구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지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밀함은 무엇이든 자신이 가진 것을 공유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서는 모든 것에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입니다. 아주 친한 벗이 있다면 그 둘은 흘러가는 세월 속에 서로를 닮아가게 됩니다. 부부가 그렇습니다. 늘 같이 삶을 영위해 가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경험하고 즐기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3년을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주무시고 대부분의 시간들을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과 함께 한 그들이 때가 되어 자신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주님께로부터 그 누구보다 많은 말씀을 들었던 그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지식이 그들을 한순간에 모두 변화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사도로 서기 위해서는 많은 실패와 넘어짐과 심지어 그리스를 배반하는 일까지 주님께서는 모두 겪으셔야 했지만 주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모습까지 모두 인내하시며 기다려 주셨고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의 참 제자요 사도요 그분의 친구로서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가장 신실하게 감당한 충성된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을 주님께서 친구로 여겨 주셨기 때문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제까지 명하고 가르친 대로 이제 제자들은 그 길을 걸어가면서 이제는 예수님의 친구들로서 사명을 수행하는 자들이 된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세우신 것은 그들을 친구로 여겨 주신 그리스도의 친밀함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