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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던 도중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극적으로 치유를 받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촌음을 다투는 시각에 이러한 사건은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고 급기야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일행에게 비보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고침을 받고 난 이후에 예수님과 그녀가 어떤 대화를 더 나누었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님은 그 여인과 더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주께서 그녀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가운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그의 딸에 관한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내용인즉, 당신이 딸이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으로 인해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결국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왜 다급하게 자신의 딸을 살려 달라는 야이로의 청에 대해서 혈루증 여인이 옷 가를 만지건 말건 그냥 부지런히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지 않고 시간을 이토록 지체하신 것일까요..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주관자에게 너무 늦은 시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시간의 주인이시고 모든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을 통제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단어 속에 희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생각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이젠 절망뿐이다. 모든 것은 나의 운명이다.

 

예수께서는 가까이 지내시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에게 큰 문제가 생긴 것을 아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나사로가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아셨으면서도 주께서는 이틀이나 더 나사로에게 가는 것을 미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과 함께 나사로의 집으로 향하실 때 주님은 요한복음 11 11절에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시각 나사로는 이미 숨이 거둔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오해할까봐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고 말씀하셨고 그럼에도 자신이 서둘러 나사로의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이르시고는 이내 나사로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게 된 마르다의 첫 반응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절규였습니다. 진작에 오셨더라면, 늦지 않게 오셨더라면 내 오라비 나사로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너무 늦게 오셨다고, 골든아워가 이미 지났다고 그녀는 예수님께 탄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정한 시간에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조급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이내 절망하기 십상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의 주인이시고 그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대로 일어나야 할 바로 그 시각에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뜻을 이루심에 있어 그 어떤 오차나 실수를 결코 행치 않으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그 일이 일어나야 할 시간에 더 이르지도 더 늦지도 않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늦으신 것이라고 여기고 싶을 때가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이처럼 내가 힘들고 지치고 괴롭고 절망스러운데 내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은 연약하고 무지한 인간의 관점에서 오늘도 나에게 일어나는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늘어놓게 되는 원망과 불평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찾아온 그 절망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그 절망의 순간을 맞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주님이 절대로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그 노상에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신속하게 야이로의 집으로 이동하셔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의 딸을 낫게 해 주시는 것이 옳고 마땅한 일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은 불필요하게 시간을 허비하신 것이고 주께서 실수하신 것이라고 여기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이성적, 과학적 입장에서 언제나 합리성, 타당성만을 따집니다. 무엇이든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부터 합니다.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라고 마치 하나님이 실수를 하신 것처럼 여깁니다. 모든 것이 다 내게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일들이었다고 분노하게 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정말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일까요..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된 것은 주님께서 정말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셔서 일어난 비극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데로 생각하고 우리가 믿고 싶은 데로 여전히 제한적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지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심을 지식으로는 다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일들과 결과에 대해서 우리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판단하고 낙심하며 절망하고 있지 않은지를 돌아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뜻대로 모든 것이 다 잘 되어야만 한다고 우리는 여기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가셔야만 했습니까.. 왜 내게 이렇게 잔인한 실패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내게 이렇게 감당키 힘든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을 안겨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이 모든 일들 또한 내 안에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섭리임을 안다면‘하나님, 당신께서는 반드시 저에게 선을 행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압니다. 부디 저를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제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 저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라고 그 모든 고난 속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만이 존귀케 되기를 원하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원하는 성도의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믿음을 주시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때가 너무 이르고 너무 늦고의 문제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인생을 지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의 그 시기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가 고민하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라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이며 세상에 드러나야 할 신자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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