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9 08:12
모든 마을에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던 주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불러 둘씩 그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여 그들을 훈련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계획과 의지로 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부터 명령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존재 역시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성도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내 선택과 의지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결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 있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우리를 보내심은 분명하신 하나님의 사명과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의 직업적 소명을 감당하는 직장에서, 캠퍼스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삶을 감당해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온전히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며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믿음으로 감당하고 극복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삶을 세상에 증명하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나타내야 할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부자로 살아가든 가난하게 살아가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모든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위해 이 세상을 살다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귀환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혼자 단독으로 파송 받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이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 이셨습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좋지 않다 여기시고 돕는 배필로서의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둘이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독불장군처럼 혼자 독선적으로 고립되어서 자기의 생각과 주장만 앞세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결코 올바른 원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부족과 허물을 인정하고 상호보완적 관계로 서로 용납하고 인내를 배우며 협력해서 주의 일을 감당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마귀는 언제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고 대적해서 상호 협력의 관계를 항상 이간하고 갈등을 빚게 하며 찢어 놓으려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지 않고 모든 것을 깨뜨려 버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부부 사이에, 그리고 지체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보십시오. 첨예하게 양분되어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음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둘이 혹은 모두가 연합해서 함께 감당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연합을 기어이 깨뜨리게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의 뜻을 우리가 받들어야 할지는 여러분이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주께서 70명의 제자들을 다시 둘씩 짝지어 각처로 보내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무리는 더 많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열두 명 만을 따로 세워 그들을 사도로 설교자로 세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열둘은 사도로 세워지기 위해 별도로 특별한 훈련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들을 보내시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오직 그것만을 주셨습니다.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9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귀신들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왜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을까요.. 사탄 마귀 귀신이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장악해서 복음을 훼방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군대 귀신에 들려서 벌거벗은 채로 쇠사슬도 끊어버렸던 거라사의 광인을 보십시오. 인간은 모두 사탄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귀신을 내 쫓을 수 있는 권능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성령은 복음을 선포할 때 사람의 영혼을 장악하고 있던 마귀를 축출하시고 한 영혼이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는,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능력을 행하십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더불어 누가복음 9장 1절에 보면 병 고치는 능력까지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심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죄 아래 고통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 죄악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셨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영원히 죄 아래 고통 당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자유케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듯이 예수의 제자들 또한 동일한 능력을 행하심으로 복음이 가진 이 상징적 의미를 영혼들에게 보이고 그것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듯이, 구원은 오직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아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영원히 죄의 저주 아래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그렇게 귀신을 쫓고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앞으로 복음을 통해서 이들이 행해야 할 일들의 예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내 쫓아 그들을 온전케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모든 영혼들을 살리고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앞으로의 그들의 사명이 될 것임을 주님께서는 이렇게 훈련시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