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3 08:25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아들로, 그리고 야고보, 요셉, 유다와 시몬의 형님으로, 그리고 그의 누이들의 오라버니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영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보여지는 것 만을 보고 보여지는 대로만 볼 뿐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선입견, 고정관념에 갇힌 자들은 영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들, 깨달아지는 것들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인본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바라보며 그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목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상태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 누군가를 소개할 때 ‘어떤 여인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사생아를 가리킬 때 쓰는 매우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마리아가 매우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었음을 의미하며 부정한 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아마도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고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언제나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부정한 그녀의 씨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이 사용한 말투를 보십시오 ‘아니냐’, ‘아니냐’, ‘아니하냐..’ 헬라어의 문법상 이러한 표현은 예수의 존재와 그 가치를 비하하고 조롱하며 멸시하기 위한 고의적인 말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잘 섬기고 충성을 다하여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더니 그 동네 사람들이 그가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어 장로가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자, 그 장로님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물론 그 동네 사람들까지 우리가 알던 개똥이네 집 그 막내아들이 어떻게 큰 교회의 장로가 됐어..라고 비웃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은 예수를 잘 믿어서 장로님이 되신 이 분의 어린 시절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된 그분은 어릴 때에 그 동네에 유명한 개구쟁이였고 못된 짓을 일삼던 자였습니다. 이러한 그 장로님의 과거로 인해서 한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장로님이 되셨어도 그 고향에서는 그의 과거로 인해서 존경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저런 놈도 커서 교회에서 장론지 뭔지가 되는구먼.. 그 장로님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대우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그 장로님의 삶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예화 속의 장로님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메시야 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비범함을 보이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책을 잡을 만한 모습이 전혀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단지 그가 나사렛이란 동네의 목수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향 사람들에게서 이 같은 멸시와 조롱을 당하신 일은 참으로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사렛이라는 시골은 메시야가 자라신 곳으로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이 될 수 있었지만 고향 사람 누구도 예수를 메시야 인정하지 않았고 그분을 경멸하고 멸시함으로 가장 저주받은 동네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진리와 복음의 가치를 익히 들어서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그 길에서 벗어나 그러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그릇된 신앙의 길로 걸어가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의 권위 있는 그 말씀을 듣고도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그 진리와 그 권능을 직접 보고도 단지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며 그들이 잘 아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차라리 그들이 나사렛 출신이 아니었다면, 어려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성장하시는 모습을, 그의 집안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들은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메시야 라면 적어도 자신들과는 전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렇게 메시야로 인정해 줄 만한 탁월한 출신성분에 외모에 무엇인가 자신들과 달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메시야는 그들이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라 자기 동네에서 자란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편견과 선입견은 이렇게 그들 앞에 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부정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이 같은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참된 믿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자기들의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사렛 촌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 그 아비된 자의 근본을 알 수 없는 마리아가 낳은 아들, 어쩌면 사생아일지 모르는, 그 이상으로 예수를 생각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사렛 사람들, 그들에게 재앙이며 저주였습니다. 사람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결코 신앙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인간이 가진 고집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예정이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 예수의 형제와 자매들을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이후에 죽을 때까지 순결을 지켰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허무맹랑한 성경을 부정하는 교리입니다. 예수의 형제와 자매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한 이후에 낳은 자식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인 동생들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그는 이후에 초대교회에서 지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유다서의 저자로 여겨집니다. 요셉과 시몬과 다른 자매들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그들 모두는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했음을 사도행전 1장은 증언하고 있고 결국 그들 역시 회심을 경험하고 초대교회의 출중한 일꾼들이 된 것으로 고증은 전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관점, 자연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시각은 나사렛 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리를 들려주고 모든 역사적 교회사적인 증거를 보여주어도 인간의 그릇된 이성적인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데는 인본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틀에 갇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절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핑계와 변명과 이유이든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뿐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이유를 모두 멸시한 채 믿을 수 없는 한두 가지 이유 때문에 결국 예수를,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정하는 자들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신앙은 이성의 범주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의 사고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고 믿어지지 않는 가치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지식적인 회심을 경험했을 뿐 진정한 중생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면 그의 신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그 계명이, 그 십자가의 은혜가 중심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증거가 그는 전혀 성령의 통치를 따르지 않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의 명령과 율례와 법도를 무시한 채 자기 자신만의 종교생활을 고집하는 것으로 모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