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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 외에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는 장면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9 30~3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 할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주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를 시작하셨고 기도를 하시던 중에 이같이 놀랍게 주님의 모습이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 두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주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와 모세였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이 두 사람, 즉 엘리야와 모세가 나눈 대화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일에 관해서였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은 이 일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제자들은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주께서 기도를 드리실 때도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틈만 나며 기도하셨던 주님과 달리 틈만 나며 졸거나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졸고 있었다는 것은 영혼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고 도무지 진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육신의 피곤하고 영혼은 병이 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기에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들이 천상에서부터 내려와 예수님과 그분의 죽으심에 관해서 진지하게 말씀을 나누고 있었을까요.. 참으로 신비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죽어 천상에 있던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수님께로 내려와서 주의 죽으심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는 이 장면을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고 이 모든 장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이 그토록 예언해 온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신비스러운 사건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제자들은 졸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우리를 실망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예배당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 귀중한 진리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도 언제나 예배 시간에 지각을 하고 혹은 예배 시간에 스마트폰을 쳐다 보거나 잡념에 빠져 있거나 졸음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예수의 제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영적으로 죽어 있거나 잠이 든 상태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부디 그 자리에서 깨어나십시오. 진지하게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졸음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기어이 또다시 입을 열어 엉뚱한 말을 늘어놓게 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의 선지자들이 홀연히 떠나자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예수님과 모세와 옐리야를 위해서 각각 초막을 세 개를 짓겠다고 말합니다. 자다가 깨어 일어나 자기의 눈앞에 보여진 이 믿기 힘든 신비한 일을 보고 난 이후에 베드로가 한다는 말은 고작 초막을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본 신비하고 황홀한 장면은 그에게 심히 두려움을 갖게 했고 그의 마음을 압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을 엉겁결에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선지자들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하셨는데 자다가 일어난 베드로는 갑자기 초막을 세 개 짓겠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광채를 뿜어내시면서 천상의 선지자들과 대화를 나누시는 이 신비한 모습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이신지를 이처럼 분명하게 보여 주셔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영적인 수준이 참으로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신비한 모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했어야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는 고백에 이를 능가하는 메시야에 대한 그의 확신과 소망을 주께 고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뜬금없이 초막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그전에 베드로는 ‘..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를 아람어로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갑자기 부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전혀 다른 일반 율법교사에게 해당하는 호칭을 그가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지금 매우 당황하여 제정신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갑자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랍비여라고 불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졸다가 깨어난 베드로의 말실수가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아무 말이나 하려거든 그냥 침묵하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되신 놀라운 모습과 천상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를 대면하게 된, 이 두려우면서도 극히 신비한 이 체험에 심취하고 압도된 베드로는 지금이 좋다는 도무지 걸맞지 않은 말들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좋다는 것입니까..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어떤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셨는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지금이 좋다고 그는 자신의 들뜬 감정을 가지고 전혀 이 상황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또다시 사람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과 며칠 전에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탄적인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이 상황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채 초막을 짓겠다는 엉뚱한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같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이 같은 스승의 신비한 모습에 매료되어 이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의 이 말은 스스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떠들어 댄 말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 초막에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거할 것도 아닌데 왜 초막을 짓겠다는 것인지, 어리석은 베드로는 그렇게 해서라도 이 신비하고 황홀한 자기가 본 일을 기념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초막이라도 지어서 오늘의 이 사건을 흔적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막은 쉬 무너지고 그 흔적은 사라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베드로는 왜 알지 못한 것일까요.. 주님의 의중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초막을 지어 기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영혼 깊숙이 오늘 그들이 본 것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 부인하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신앙의 본질을 신앙의 그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쳐 버리고 다른 것들에 집착하거나 전혀 엉뚱한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마음에, 영혼에 담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가치들을 붙잡고 그것에 우리의 열정이나 우리의 그릇된 자기 열심을 쏟아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주께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우리에게 이것을 보이시는 것인지, 지금 우리 앞에 보여지는 것, 나타나고 있는 것, 주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 인지를 아는 일에 우리의 영혼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신앙은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전혀 올바르지 않은 가치에 치우쳐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염두 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미쳐 다 깨닫지 못하는 진리를 듣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은혜를,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항상 다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1년이 지나서 알게 되는 진리도 있고 10년이 흘러서 마침내 그때 그 일이 내가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측량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야 그것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는지를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은 자신이 보게 된 이 신비한 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후에 그는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그때 그 일을 기억하며 성경에 그 의미를 정확히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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