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7 08:13
아이의 아버지는 이 아기가 겪어온 일에 대해서 이어말하기를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고 말했습니다.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고자 한 일에 대해서 예수께서 고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의 목표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무신론적이고 비 성경, 반 기독적인 사상과 철학과 지식을 세상에 유포해서 영혼들을 미혹하여 그것을 철저하게 믿고 신봉하게 함으로 교회를 다녀도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영혼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악은 우리를 죽이려는 사악한 영적인 존재들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렇게 선으로 위장된 악을 지지하고 좋아합니다. 자기의 영혼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려 하는지도 모르고 그 악이 주장하는 정의로운 것 같으나 지극히 사악한 그들의 기만에 넘어갑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와 명철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왜 공산주의나 LGBTQ 같은 반 기독적인 사상이 박멸되지 않습니까.. 왜 무슬림을 비롯한 다른 이단 사이비 유사 종교들이 여전히 존재합니까.. 모두 사탄이 그 꼭대기에서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가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게 하기 위해 그렇게 수많은 인간들을 미혹할 교묘한 사상과 철학으로 여전히 영혼들을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 마귀 사탄은 인간을 그 영혼을 죽이고자 하는, 멸망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목적을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이 땅 가운데서 행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난 사자처럼 오늘도 삼킬 자들을 두루 찾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자기 자식이 당한 고통을 예수께 말씀드리며 이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주님께 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아비를 꾸짖으시며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구원을,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병 나음을, 형통을 이 땅에서의 건강과 번영과 성공을 약속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죄인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고자 하는 종교입니다. 영원한 내세를 선물하는 진리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자꾸 이 현실에서 받을 복과 치유와 무병장수와 결합시키지 마십시오. 그것은 복음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가치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이 선물하려는 것은 온전한 구원입니다. 죄 아래 고통 당하던 인간의 전적 타락의 그 실존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입니다. 이 복음이 만사형통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얼마나 많이 그릇되게 전파되었고 수많은 미신적인 믿음을 만들어 냈는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병이 안 나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결국 병이 낫지 않아서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사업에 실패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회사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까..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이 주의 말씀을 안 믿었기 때문입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진리를 안 믿었기 때문입니까..
이 모든 것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중대한 오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축복받는 믿음이 아니라 영생하는 믿음이 핵심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경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 좁은 길을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치유를 위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신유와 관련하여 사용합니다. 병이 나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는 논리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병 낫기 위한 조건부의 말씀일까요.. 믿음이 병이 낫고 귀신을 쫓는 일에만 필요한 가치입니까.. 그것은 믿음을 오해한 것이고 지극히 한 부분에 대해서만 논한 것일 뿐입니다.
믿음의 가치는 능력입니다. 영혼을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는, 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며 영혼을 치유하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치유가 갖는 상징성은 바로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이의 아버지는 그에게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주께서는 그 아비의 문제의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신뢰와 의존의 태도가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머리로만 믿어볼까 말까 하는 태도가 아닌 전적인 의지와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강력한 동기가 우리의 의지만으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삶에 절박한 어떤 문제나 간절한 상황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아버지에게 그 아들의 문제가 그러한 강력한 동기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주께 절규했습니다. 주께서 지적하신 말씀을 듣고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즉시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어떤 답변도 지금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울부짖듯이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 아비는 믿음 있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들 때문에 절박하고 간절하기는 했지만 주께서 정말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실 것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고백했고 이어 그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주께 간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를 믿기 위해서 교회에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과연 현실 적으로 나에게 믿음을 주실 수 있는지, 과연 지금 나의 이 문제 속에 이 갈등 속에 주께서 임하셔서 이러한 문제까지 해결해 주실 수 있는지에 대해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증거입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로 인해서 주님을 향해 절박한 마음을 갖기는 했지만 주님께서 정말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절박함과 절심함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주께서 나를 구원하실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그래서 보험을 들기도 하지요 믿음이 거기까지만 이르면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진정으로 나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온전히 그리스도를 신뢰할 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 속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중한 질병에 걸렸다면 의사에게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병을 낫게 해달라고 살려 달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절박하고 간절해야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태도와 모습은 이와 거리가 멀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깨닫게 하시지만 결국은 주님을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강화 시키시고 더 분명한 확신을 갖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으면서도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 교회나 한 번 다녀볼까, 저 교회나 한 번 나가볼까.. 이런 태도와 마음이 아니라, 이곳에서 주님을 기필코 만나고야 말 것이다. 이런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을 좇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