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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에 관한 개혁주의적 이해

2015.01.21 14:15

SDG 조회 수:2009

직분에 관한 개혁주의적 이해
- 한국교회 직분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 

이광호(Ph.D) 

Ⅰ. 서론 

   직분은 교회를 지탱하는 뼈대와 같다. 직분이 없으면 아무리 순수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제각기 자기 마음에 따라 행하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온전히 교회를 세워나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직분을 은사로 허락하셨다. 우리 시대 교회가 세속화 되고 허물어져 가는 저변에는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적용이 없기 때문이다. 즉 직분이 허물어지고 직분자들이 교회로부터 부여받은 직분을 잘못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작금에 이르러 제기되고 있는 불건전한 평신도 운동은 자칫 직분제도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기 쉽다. 칼빈은 교회의 직분제도와 교회정치를 폐지시키려 하거나 불필요한 것이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를 파멸시키고 파괴하려는 위험한 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교회의 회복을 위해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함으로써 직분을 기초한 온전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현대 한국교회가 성경이 언급하는 직분 이외에 다양한 부수적 직분개념, 직책, 직임 등을 도입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목적지향적 단체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다양한 직제들을 둠으로써 외형상 활발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겠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직분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그 배경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인본주의적 발상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직분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 현대교회가 직분에 대해 잘못 알고 그릇 적용하고 있는 부분들을 반성적으로 되새기면서 직분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직분이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하는지 검증해 보기를 바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어지러운 세태 가운데 존재하는 한국교회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세워져 가는데 우리 모두가 힘을 모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Ⅱ. 교회와 직분 
  
  1. 직분의 의의
     교회의 직분제도는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상속하여 유지보존하기 위해 허락하신 주님의 은사이다. 주님의 은사라 함은 그것이 인간들의 지략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즉 직분은 교회를 잘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제정된 제도가 아니라 지상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은 교회역사 가운데 발전한 것이 아니라 사도교회 시대부터 요구되고 상속되어 온 교회의 제도임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직분은 교회 역사상 앞 시대와 무관하거나 단절되어 독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세계에 흩어져 있는 건전한 여러 교회들의 직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거나 독립된 상태가 아니다. 직분과 직분자는 우주적 교회와 보편교회, 나아가 공교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존재인 것이다.
  교회에 허락된 다양한 직분들은 내적소명과 외적소명을 요구한다. 내적소명이란 개인 성도가 특정 직분을 감당할수 있는 하나님의 내적인 부르심이 있느냐 하는 문제이며, 외적 소명이란 교회의 회중이 그를 직분자로 부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통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세워 교회의 직분자가 되게 하실 때, 그 자신이 느끼는 바 내적인 소명을 교회 회중이 선출하는 방법의 외적인 소명을 통해 인쳐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직분으로 부르신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생각해 보야 할 점은 내적 소명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즉 어떤 사람이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적 부름을 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면 그것을 곧 내적 소명이라 확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가지는 그런 감정을 내적소명이라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은 내적 소명이 아니라 개인이 가지는 종교적 욕망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직분을 가지고 싶다고 열망하는 것 자체를 두고 성급하게 내적 소명과 연관지어서는 안된다. 물론 직분을 위해서는 내적 소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마음속에 생성되는 자기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시는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내적 소명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움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봉사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런 내적 소명을 확인하는 작업이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교회 회중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각 성도들의 내적 소명을 확인하는 일이 교회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의 직분자 선출을 실행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직분 이외의 어떤 유형의 직책이나 직임도 직분 이상으로 의미화 하지 말아야 한다. 편의상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어떤 직책이나 직임이 필요하다면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편의적 의미가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에 직분 이상으로 의미화가 시도되는 직책이나 직임이 있어서 영구적 성격으로 존재하게 되면 그런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자격을 만들어 내는 그런 현상들이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점차적으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2. 직분은 주님 이외에 달리 교회의 주인이 없음을 선포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피로 값주고 사신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인이신 하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거나 주인을 대리하려 해서는 안된다. 모든 직분자들은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알아가며 그의 직분적 요구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에 직분제도가 있는 것은, 개인이 자기 취향이나 판단에 따라 교회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역할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는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되며 허락된 직분들을 통해 공동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직분은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직분자의 개별적 판단이나 행동 자체가 주님의 뜻을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직분자들은 누군가에 의해 임명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 회중에 의해 선출된다. 그것은 단순히 민주적 절차에 의한 선출이 아니라 교회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직분은 직분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특정인의 능력이나 리더십에 의존하지 않는다. 
  직분에 관한 모든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행사되어야만 한다. 특정한 목적을 지닌 선교단체와 차이나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고유한 성격 중 하나는 개별 직분자의 리더십이 특별한 권한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교회에는 다양한 능력들이 필요하지만 교회가 필요로 하는 능력은 개인의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제시된 공적 직분 즉 은사인 것이다. 직분으로 드러나는 그런 집합적 은사들이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가게 된다. 개혁교회에서 다양한 직분들이 필수적인 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친히 일하고 계심에 대해 고백적으로 반응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3. 직분에 대한 오해 

     (1) 직분, 부수적 직분, 직책, 직임
         직분은 교회의 필수요건이다. 즉 정상적인 교회에 직분이 없으면 안된다. 이에 반해 부수적 직분은 없어도 되며, 성장한 교회에서는 도리어 불필요한 것들이다. 한국교회에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 이외에 부수적인 임시직분들이 많이 있다. 강도사, 전도사, 권사, 서리집사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강도사, 전도사를 직분으로 볼수 있느냐는 생각을 해 볼 때 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쉽지 않다. 즉 교회가 직분자로서 선출하지 않은 직분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특이한 직분인 권사라는 명칭 자체는 성경에 전혀 언급이 없다. 그렇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교회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직분자로서 권사라면 여자 장립집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는 디모데전서 3:10,11에 대한 해석에서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위 본문 구절에서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한글개역)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집사직분과 관련되는 구절이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기울이는 내용은 ‘여자들도 특정한 조건을 갖추면 집사가 될 수 있다’고 이해될 수 있는 11절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본문에서 말하는 ‘여자들’이란 독립적으로 쓰여진 단어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그것은 곧 성경이 여자집사를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만일 여기의 ‘여자들’이 독립적으로 쓰이고 있다면 여자 장립집사도 가능하며 직분에서 여자의 위치가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그렇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한국장로교에서는 여자 장립집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여자들’이 집사인 남편에게 종속된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제 직접적인 몇몇 성경 번역들을 우선 살펴보고자 한다. ‘여자들’을 독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여자집사를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성경번역들은, 한글개역성경(여자들), 표준새번역(여자들), 새번역(여집사들), Jerusalem Bible(the women), NASB(Women), 新改譯(일본어성경: 婦人執事) 등이다. 그리고, ‘여자들’을 남자 집사의 부인으로 번역하고 있는 성경은 현대인의 성경(그들의 아내들), 공동번역(보조자의 아내들), KJV(their wives), NIV(their wives) 등이다. 이와같이 상이한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은 11절과 12절의 연관성 문제 때문이다. 즉 12절에서 다시 ‘집사’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함을 언급한 것은 앞의 내용과 별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직접 연관된 내용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11절의 ‘여자들’에 대한 헬라 원문을 살펴보면 그 단어가 종속적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헬라어 성경원문에 비평의 여지가 없다면 우리는 여성의 집사안수 문제를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16:1에 언급된 ‘우리자매 뵈뵈’에서 ‘집사’를 일컫는 단어 διακονον이 쓰이고 있음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권사제도는 특이한 직분처럼 둘 것이 아니라 그 명칭을 바꾸어 여자 집사로 직분명을 바꾸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남자 집사와 다른 요건인 별도의 제한 등은 바꾸어져야 할 것이다.     
  그와는 별도로 한국교회에 있는 서리집사 제도는 매우 특이하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것을 과연 직분이라 해야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한국교회의 서리집사는 회중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 직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서리집사는 헌법상 교회에서 직분자로 인정받고 있다. 서리집사는 제직회에 참석하여 교회의 중요한 의결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으로 보아 잘못된 것이다. 즉 교회 회중이 투표를 통해 그 일을 맡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직분자회인 제직회에 참석해 직분수행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교회에는, 부수적 직분과는 또 다른 직책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교회 가운데 특별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구성된 임시적 기관에서 일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두는 일종의 직능이다. 교회내 다양한 기관들은 전도 사업이나 구제사업 혹은 교육, 친목 등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설립된 교회내의 기구들이다. 각 기관들에는 회장과 총무, 서기 등 임원들이 있는데 그 임원들이 곧 여기에 속하며 그들은 각 기관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바는, 투표라는 과정은 동일하지만 직분자 선출을 위한 투표와 다른 임시적 기관에서의 시행되는 투표는 본질상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즉 직분자 선출을 위한 교회 회중의 투표에서는 사전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 직분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 직분을 맡고 싶다고 해서 맡게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직분자는 올바른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교회로부터 세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여러 기관들에서 회장이나 총무 등 임원을 선출할 때는 교회의 덕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도 있고 투표 전 소견 발표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기관에서 목적하는 바 일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직책을 맡기는 것이다.                
  한편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대장, 지휘자 등은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자가 아니며, 다른 직책들처럼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교회의 특정 기관에서 임명을 받아 직임을 행하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잘 기억해야 할 바는 어떤 경우에도 직분보다 직책이나 직임이 더 중요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각 부서의 회장이나 성가대 지휘자와 같은 직책 및 직임보다는, 외적으로 그런 식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교회의 회중에 의해 세움을 받은 집사직분이 본질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직책이나 직임이 직분 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즉 집사의 직분은 대중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맡겨진 직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나 직분이 아닌 다른 직책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나아가 부수적 직분자나 일부 직임자들 가운데는 유급직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더 중요한 일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기도 하다. 교회에서 목사나 교사(신학교수)의 생활비를 부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교회가 선출을 통해 그들에게 직분을 맡기면서 그 일을 전담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사나 교사로 세우기 위해 교회가 특별히 요구한 목사 후보생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그 이외에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 등 특정 직임자들에게 ‘사례비’ 명목의 일정액의 급여를 상시적으로 지급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2) 직분은 개인에게 주어진 교회내 계급인가? 
         교회의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계급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직분은 세상에서 보여주는 어떠한 명예를 제공하지 않으며 여하한 개인적인 권력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모든 직분은 상호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모든 직분자들은 성도들간에 존재하는 유기적 관계 가운데서 기능해야 한다.   
  교회의 각 직분들은 개별적이지 않고 집합적이자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직분을 맡은 개개인의 능력이 교회 가운데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 직분들의 집단적 의미가 중요하다. 직분은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매체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신령한 은사이므로 개인이 중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집합적 의미와 전체 교회가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분에는 어떤 경우에도 진급개념이 없다. 진급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것은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계급적 개념에서 목사가 가장 우위에 있고 그 다음에 장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집사라는 생각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직분이 마치 계급제도처럼 인식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입교하면 일정기간이 지나 집사직분을 맡게 되고, 그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시 장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로는 소위 평신도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양 오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성도가 한평생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장로가 되지 못하면 신앙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직분관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며 매우 잘못된 생각임이 분명하다. 건강상의 여건이나 특수한 형편으로 인해 직분을 감당하기 어려운 성도이면 비단 신앙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직분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온전하고 성숙한 교회라면 모든 성도들이 직분과 관계 없이 동일하게 올바르며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고착된 직분의 계급화는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다수의 성도들은 장로가 되기 전에 집사 직분을 맡고 그 다음에 장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사직분을 가지거나 장로 직분을 가진 자들 중에 목사가 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것은 마치 직분에 상승작용 개념이 있는 듯이 비쳐지게 한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그런 현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입장을 바꾸어서, 장로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던 성도가 다시 집사 직분을 가지게 되면 이상한 것인가? 그리고 특별한 경우 목사직분을 감당하던 성도가 장로 직분을 가지거나 집사 직분을 가지게 되면 강등 당하는 것인가? 교회가 회중의 요청에 따라 직분자를 그렇게 세운다 할지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것이 우리 정서에는 전혀 맞지 않다고 여기는 사실은 이미 직분을 계급의 한 형태 내지는 명예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 집사 직분을 맡고 있던 성도가 목사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면, 목사 직분을 감당하던 성도가 장로나 집사직분을 행하게 된다해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한 개별 성도가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을 두루 수행할 만한 은사적 능력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과 교회가 실제로 그렇게 세우느냐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이다. 
  흔히 목사, 장로, 집사를 항존직으로 말하는데, 사실은 이 모든 직분들이 항존직이다. 항존직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자들은 종신직과 항존직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 항존직이란 역사 가운데 상속되는 교회 가운데 항시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직분이라는 뜻이며, 한번 직분을 받은 자가 평생 가지게 되는 종신직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항존직인 집사로 장립을 받은 성도가, 그 직분을 중단하고 장로로 장립되기도 하며 집사나 장로로 장립받은 성도가 그 직분을 중단하고 목사로 장립받기도 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직분이 개인을 위한 직책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직분이라면 교회의 의사에 따라 새로운 직분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교회의 의사를 통한 직분자 선임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직분은 교회내에서 특정인이 가지는 권력이나 통치수단이 될 수 없으며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직분은 도리어 섬기며 봉사하는 방편이다. 직분을 감당하면서 마땅한 은혜의 권위를 가지게 되지만 그것은 개인에게 주어진 권력형 권위는 아니다.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성도들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교회의 폐단 가운데 하나는 직분자체를 권위나 권력으로 생각하거나 명예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감히 누가 개인적 권위를 가지며 권력을 가질 수 있는가? 누가 감히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명예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지역 및 시대교회의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변질되면, 잘못된 자들은 직분을 성도들을 다스리는 통치수단으로 오해하게 되며 결국 직분을 개인을 위해 도구화하기 쉽게 된다. 설령 그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직분을 이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부패한 인간은 자기 지향적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Ⅲ. 직분의 종류와 각 직분회 

   1. 직분의 종류
      직분에는 계층적 높낮이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직분과 직분 사이에는 매우 분명한 경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깊은 연관성을 가지게 된다. 어느 직분이 더 권위있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느냐 하는 것은 잘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즉 어느 직분이 상하거나 변질하게 되면 가장 치명적이 되느냐 하는 점을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보편적인 인간들은 핵심적인 일을 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인정을 받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자기 삶을 의미화하려는 욕망이자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교회 가운데 침투해 들어오게 되면 마치 특정 직분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더 크게 쓰이는 듯한 미숙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입으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자기 인생을 살찌우기 위한 종교적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 이상 아니다. 직분은 온전히 교회에 속하는 것이며 개인의 의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직분의 종류를 이야기하면서 항존직과 임시직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항존직이란 교회에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직분을 말하며, 임시직이란 지교회가 특별한 형편상 항존직 직분자를 두기 어려울 때 필요에 따라 임시적으로 두는 직분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항존직이란 말은 개인이 특정한 직분을 받게 되면 종신토록 그 직분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항존직은 초대교회로부터 있어 왔으며 현재까지 교회 가운데 있으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있어야 할 직분이다. 그것을 항존직이라 한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들에서는 일반적으로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 네 직분을 두고 있으나 장로교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 등 세 직분을 두고 있다. 장로교에서 세 직분을 두고 있는 것은 교사직분을 목사직분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네 직분을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 목사와 교사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사이에는 미세하기는 하나 직분론에서 약간의 차이가 난다. 개혁교회에서는 직분을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네 직분으로 구분하는데 반해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 세 직분으로 나눈다.       
  칼빈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기록된 “사도들(Apostles), 선지자들(Prophets), 전도자들(Evangelists), 목사들(Pastors), 교사들(Teachers)”을 근거로 하여, 교회에 있어야 할 기초적인 직분을 이해했다. 그는 앞의 세 직분들은 사도교회에 있었던 특별한 직분들로서 그 이후 교회에서는 ‘필요에 따른 특별한 경우’에만 있을 수 있으며 교회에 상존하는 직분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나중의 두 직분인 목사와 교사는 교회시대에 있는 항존적 직분으로 이해했다.    
  칼빈의 견해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교사 직분자는 말씀선포나 성례집행, 권징사역을 담당하는 임무를 가진 것이 아니라 공교회 가운데 온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보존하기 위한 교회의 박사들(doctors)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직분자로 이해한다. 이는 우리시대의 신학교수들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개혁교회의 직분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에베소서 4장 11절에 기록된 교사와 목사를 동일한 직분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장로교회의 직분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렇게 이해하는 이들은 본문의 <τοὺς ποιμἑνες και διδἁσκαλοι>를 ‘목사들 즉 교사들’로 번역하여 연결된 하나의 직분으로 보는 것이다. 이 때 ‘목사들’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 <τοὺς>가 있고, 교사들 앞에는 그 정관사가 없으므로 ‘목사와 교사’를 하나로 보고 있다는 인상이 강조되며, 따라서 이 둘을 연결시키고 있는 접속사 <και>는 중언법(重言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루이스 벌코프 같은 학자가 에베소서 4장 11절의 ‘목사와 교사’라는 말을 두 종류의 다른 직분이 아니라 두 가지 연관된 기능을 가진 한 종류의 직분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① 목사 
      이런 가운데서 보면 목사는 공예배에서의 말씀선포와 성례집행, 권징사역, 축도를 감당하는 직분이다. 거기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익숙하여 교회의 인정을 받는 자로서 회중의 선임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로부터 세움을 받아, 항상 성도들로부터 ‘배나 존경받는 자’(딤전5:17)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목사에게 어떤 특별한 권한이나 권력이 주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목사는 결코 단체의 최고 책임자나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의 직분자들 가운데 가장 자의적으로 직분이행을 할 수 없는 자가 목사이다. 목사는 자기 의중에 따라 설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직분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목사가 설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다가 쉽게 주님의 뜻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성례집행, 권징사역, 축도 등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목사가 결코 자의적으로 설교하거나 성례집행 및 축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목사 직분을 받은 성도는 교회가 부여한 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씀을 드러내며 예배에 수종들 수 있는 직무를 부여받은 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즘 들어, 목사가 특권을 가진 자인 인 것으로 직분을 오해하는 자들은 여자목사제도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한국교회는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는 분위기이지만 성경적인 명확한 검증이 필요하다. 목사는 결코 설교를 통해 자기 역량을 펼치는 통치자나 권력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교회의 직분을 인간의 시대적 조류에 따라 결정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목사가 해야할 일 중 하나는 교사 즉 신학교수들을 독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교권적 감독이 아니라 신령한 독려여야 한다.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교회내부로 침투해 들어오는 비 신앙적 요소들에 대한 해답을 공교회적 입장에서 확인하기 위해 신학교수들에게 지속적인 답변을 요구함으로써, 목사와 교수들은 상호연관성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장로교에서 개혁교회와 달리 교사 즉 교수의 직분을 따로 두지 않는 것은 목사직분과 신학교수직분의 공교회 가운데서의 동등성과 밀접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내에서 목사에게 맡겨진 다양한 임무들 중 가장 중요한 사명은 역시 말씀선포이다. 이는 매주 회집되는 공예배 중에 이루어지는 목사의 직분적 사역이다. 말씀선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예언적 성격을 지닌다. 이는 말씀선포가 개인적 성향에 따라 이루어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주어진 책무가 성례의 집행과 권징사역, 그리고 축도이다. 성례와 권징사역 및 축도는 말씀선포와 직접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께 속함에 대한 고백과 교회의 순결유지 및 교회의 상속을 선포하며 그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목사는 다른 직분과는 달리 소속이 노회이며 원리적으로 목사는 노회의 파송을 받아 지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하는 자이다. 거기에는 지교회의 정치적 예속을 받지 않는 가운데 소신있게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노회가 임의로 특정 목사를 지교회에 파송하지 못하며 지교회의 청빙과 투표절차를 거쳐 2/3의 동의에 따라 노회가 파송하게 된다. 이는 노회와 지교회의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인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② 교사(신학교수) 
       성경에서 말하는 교사직분자란 오늘날 신학교수들을 일컫는다. 장로교회에서는 교사직분을 독립된 직분으로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목사직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교사를 일반목회자와 구분된 특별한 직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한 직분이란 직분자체의 의미에서도 그렇거니와 선임과정에서도 그렇다. 목사, 장로, 집사 등 다른 직분들이 노회와 지교회에 속한 직분인 데 반해 교사는 노회 뿐 아니라 공교회 즉 교단에 속한 직분이다. 그러므로 지교회의 청빙과 투표에 의한 선임이 아니라 전체 공교회에서 살펴 선임함으로써 말씀해석자와 교육자로서 교사직분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수직은 공교회적 직분이며, 교수는 공교회의 신학적 일치와 유지를 위해 말씀을 끊임없이 해석해야 하는 직분자이다. 그들은 교회의 치리나 교회정치에서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이는 정치적 영향에 관계없이 순수하게 말씀을 잘 해석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사 직분자의 직무를 요약하면 교회상속을 위한 목회자 양성과 말씀에 대한 공교회적 해석자로서의 직무이다. 목회자를 양육한다는 것은 말씀을 통한 교회의 상속이 그 중심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말씀해석에 대한 직무란 역사적 시대 속에 존재하는 교회를 위해 끊임없는 해석작업을 진행해 가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 가운데 끊임없이 양산되는 세속적 사조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은 교수(교사)의 중요한 책무이다. 그것을 통한 변증적 논설들이 목사들에게 제공되어, 교회 가운데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도록 하는 봉사의 의무를 감당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신학자들은 목사에 대한 봉사자라는 사실이다. 즉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 직접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 직분이 매우 중요하며, 목사의 그 일을 위해 신학자들이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 즉 교수들은 공교회가 맡긴 직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하며, 목사는 공교회가 인정한 신학자들의 해석과 그 권위를 인정하고 교회 가운데 그것들을 잘 적용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신학교 교수가 마치 목사보다 더 명예롭거나 중요한 것 처럼 생각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직분을 명예처럼 인식하고 있는 시대적 결과이자 잘못된 경향 때문이다. 이는 과거 교회들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이며, 우리시대에 생성된 특이한 풍조이다. 신학자들은 목사들에게 신학적 해석을 제공하는 자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목사들의 공적 사역을 위해서 존재하는 직분이며, 그런 봉사들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가 든든히 서 가게 되는 것이다. 굳이 주종(主從)관계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목사가 주(主)이며 교수가 종(從)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수인 교사는 목사들의 올바른 설교를 위해 해석을 담당하는 이론적 직분자이며 목사는 교회의 사역에 직접 참여하는 실천적 직분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 장로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의 감독을 맡은 직분자이다. 이는 단순한 감시자라는 말이 아니라 선한 치리자라는 말을 포함한다. 장로가 감당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감독 직무는 공예배시 이루어지는 목사의 설교에 책임있게 참여함으로써  관찰하는 일과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사랑으로 감독하는 일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장로가 감당해야할 가장 중요한 직무는 목사의 설교에 대한 공적인 참여와 나눔인 것이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당회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할 가장 소중한 직무는 목사가 선포한 말씀에 대한 당회원들 사이에서의 나눔이다. 이는 목사의 설교가 좋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비판이나 평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말꼬리를 흠잡는 그런 목적도 아니다. 당회에서는 목사가 설교한 성경본문을 펼쳐두고 함께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본문의 의미를 새기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목사의 설교가 올바르게 잘 선포되었는가 하는 점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장로의 직무를 통해 목사는 자의적으로 설교하지 않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장로가 그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해 목사와 버금가는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     
  거기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중요한 일은 장로들이 목사와 함께 설교본문을 정하는 것이다. 설교본문을 정하는 것은 당회가 감당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는 당회가 목사에게 특정 본문을 설교하도록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당회가 모여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선포될 말씀의 본문을 함께 논의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우리 시대에 설교본문을 목사가 혼자 자의적으로 정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며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비판없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그런 관행이, 한국교회의 강단이 허물어지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장로의 직무 가운데 또 다른 중요한 일은 성도들을 일일이 심방하는 일이다. 그 심방의 기초는 역시 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심방의 목적은 결코 교인들을 단순히 관리하거나 격려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심방을 부목사나 여전도사, 권찰 등에게 맡기는 것은 올바른 직분적 사역이라 하기 어렵다. 장로가 직접 심방을 하지 않고 다른 직분자나 교인들에게 그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런 류의 심방은 교인관리 수준에 머무를 수 있으며 장로들이 해야할 참된 직무에 대한 방해기능을 할 우려마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로들의 심방은 주일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설교와 직접 연관이 된다. 장로는 교인을 심방하며 그들이 목사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설교에 온전히 잘 참여하는 지 확인해야 하며,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 선포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지 그리고 가정생활과 자녀양육에서도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지 확인하며 독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장로는 목사와 함께 성례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다. 당회의 모임에서 각 성도들의 신앙상태에 대해 보고하며 그들을 기억하는 가운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장로들은 또한 목사와 함께 성례를 준비하며 복음에서 떨어진 자들을 위해 어떤 권징을 시행해야 할지 논의하게 된다. 여기서 권징은 단순히 징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권징이라 하면 곧 징계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권징은 권면과 징계이며 말씀을 통한 교육(discipline)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장로들은 일반적으로 원래의 직무를 거의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교회들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에게 맡겨진 직분이 아니라 집사들에게 맡겨진 재정에 관한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당회가 마치 교회의 일반 의사결정을 위한 최고 의결기관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관행이며 불행한 일이다.       

  (3) 집사 
      집사직분은 다른 직분들 보다 덜 중요한 직분이라는 생각은 결코 옳지 않다. 다른 직분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존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주님께서 허락하신 귀중한 직분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에는 집사직분이 제 기능을 거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마치 중세 로마교회에서 장로가 교권적 사제에게 시중을 드는 보조자격자로 격하되었던 형편과 같은 비슷한 형국이다.  
  집사 직분은 교인들의 생존과 관련된 일상적 삶과 연관이 된다. 즉 먹고 살아가는 문제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정당한 노동을 하고 그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수입 가운데 일부를 교회에 은혜의 연보를 하게 된다. 그 연보는 단순히 기부금처럼 돈을 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에 대한 고백적 표현이다. 그렇게 해서 모여진 돈을 집사직분을 맡은 성도들이 교회의 여러 일들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     
  집사직분은 교회의 재정적인 논의와 함께 교회적 구제사역에 관한 문제 등을 담당한다. 집사는 역시 목사, 장로와 연관되는 직분으로써 장로들의 심방을 통해 구제의 필요성이 있는 성도들에 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공적인 재정문제 뿐 아니라 성도들의 기본적인 생활형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들간의 생존에 관한 공평한 삶을 주 안에서 이루어 가도록 직분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 처험 이러한 일을 감당하는 집사직분을 남성에게만 주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잘 검토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교회들은 여성 집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들어와 여성 목사제도와 여성 장로제도를 수용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 집사제도를 점차적으로 수용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4) 그 외 한국교회의 특이한 부수적 직분들 
      한국교회에는 특이한 직분과 임시직분이 있다. 특이한 직분이란 사족과 같은 불필요한 직분이며, 임시직분이란 교회가 아직 어려 정상적인 직분을 둘 수 없을 경우에 일시적으로 두게 되지만 교회가 성장하여 항존적 직분자들을 세우게 되면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는 직분들이다. 
  특이한 직분들 중 대표적인 것은 권사, 강도사, 전도사 등이며, 임시직분으로는 서리집사이다. 권사는 한국교회에만 있는 특이한 임시직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직분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그런 입장에서 임시직에 대한 권사임직식을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관행이다. 다른 외국의 교회들에는 없는 직분이기 때문에 권사를 번역할 때 흔히 ‘Senior Deaconess’라고 한다. 이는 ‘선배 여집사’라는 말이다. 필자는 이 글의 앞 부분에서 권사직분에 대한 언급을 하며 그것을 여자 장립집사로 이해할 수 있음을 이야기 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항존직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개혁주의 교회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여성들에게 ‘권사’라는 이름의 특별한 직분을 만든 것은 성경에 의한 직분으로서가 아니라 여성 예우차원에서 제정한 제도이다. 그러나 임시직으로 규정된 권사직분이라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직분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권사는 장로, 장립집사 직분과 마찬가지로 고시를 쳐서 시험에 합격해야만 하는 직분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교회의 직분이 그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존재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사직에 대한 분명한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강도사’는 과거 한국교회에 목사들의 수가 부족할 때 독립적으로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임시적 종속직분이라할 수 있다. 즉 ‘강도사’는 정상적인 교회 상황에서 있었던 직분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때 목사와 동등한 자격으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도록 허락된 임시적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사의 수가 부족하지 않은 때에는 더 이상 강도사 제도가 필요하지 않다. 설교할수 있는 자격은 가졌으나 성례를 집행하거나 축도를 하지 못하는 직분이란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직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도사 역시 한국교회에 있는 특이한 임시적 직능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전도사는 Evangelist가 아니라 Assistant Pastor이다. 한국교회의 전도사들 중에는 교육전도사, 심방전도사, 음악전도사, 행정전도사, 찬양전도사 등이 있다. 또한 한국교회에는 권찰이라는 매우 특이한 직임이 있다. 권찰은 심방전도사와 마찬가지로 교인을 심방하는 일을 하는데, 심방은 원래 그들에게 맡겨질 일이 아니라 장로들이 해야할 직분적 사역이다. 
  서리집사 역시 사실상 한국교회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직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항존직으로서 장립집사를 세울만한 형편이 되지 않은 어린 교회에서 일시적으로 그 직무를 맡기기 위해 있던 직분이 서리집사이다. 교회는 아직 당회를 구성할 만큼 성장하지 못한 미조직 교회라 할지라도 목사나 장로 등 특정 직분자가 단독으로 운영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여 장립집사들을 둘 수 있는 경우라면 더 이상 서리집사가 필요하지 않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회중의 선출과정을 거치지 않은 서리집사가 마치 일종의 대우차원 혹은 교인 관리차원에서 주어지는 직분처럼 되어 있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직분을 오용 및 남용함으로써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는 임시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서리집사가 제직회원이 되어 있는 것은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일이다. 더구나 제직회에 속한 집사라고 하면서 직분과 관련된 자기 책무가 없거나 직분에 대한 인식이 없는 형식상의 집사직은 교회를 화석화할 위험마저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도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은 집사들이 특별히 행해야 할 직분적 일이 아니라 목사, 장로, 집사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고 행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공로목사, 원로목사, 원로장로 등 교회내에 직분과 관련되어 존재하는 명예직들은 아무런 역할이 없을 뿐 아니라 직분적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불건전한 제도를 바탕으로 한 직분적 이름들은 마땅히 없애야 할 명칭들이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 이외에 달리 특별한 명예를 받을만한 직분자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 시대의 많은 교회들에서 일반적으로 두고 있는 부목사 제도는 바람직한 제도가 아니다. 동일한 목사 직분을 받은 성도들 사이에 또 다른 계급적 계층을 둘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 교회의 원활한 유기적 활동을 위해 당회장이 필요하다면 목사들이 번갈아가며 봉사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그것이 마치 권위나 권력의 상징처럼 되어 인식되어 행해지고 있는 것은 세속화의 결과이다.          

  2. 교회의 각 직분회와 그 기능
     한국교회에는 직분을 감당하기 위한 모임으로 대개 당회와 제직회가 있으며, 전체 성도들이 모이는 공동의회가 있다. 당회는 목사, 장로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그리고 제직회는 당회원들을 포함한 집사들과 다른 임시직분자들이 포함된다. 제직회는 교회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의결기구라 할 수 있으나 한국교회의 제직회는 회중에 의해 선출된 직분자가 아닌 서리집사 등이 포함된, 요건을 정상적으로 갖추지 못한 기형적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 중 한 가지는 한국교회에 마땅히 있어야 하지만 있지 않은 집사회이다. 한국교회에는 집사회가 없는 상태에서, 당회와 당회원들이 포함된 제직회가 재정을 비롯한 집사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통괄적으로 논의하다 보니 직분적 봉사영역이 명확하지 않아 집사들의 직분기능이 약해지는 것이다. 
  당회로부터 독립된 집사회가 교회의 재정을 비롯한 구제사역에 관련된 제반사항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직분의 독립성과 다른 직분과의 상호연관성을 통한 협력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필요한 기관은 당회와 제직회 두 기구가 아니라, 당회, 집사회, 제직회 세 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당회에서 결정한 내용들은 당회가 제직회를 거쳐 공동의회를 통해 교회의 최종의사를 확인하듯이 집사회 역시 제직회와 공동의회에, 맡겨진 직무들에 대한 보고를 함으로써 교회의 최종의사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재 한국교회의 직분적 기관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는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의 회원이다. 그리고 집사는 제직회와 공동의회의 회원이며 일반 직분을 맡지 않은 입교인들은 공동의회 회원이다. 그렇게 되면 직분의 역할과 경계가 균형있게 구분되지 않을 우려가 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인 권위는 당회가 가지지만 재정과 교회적 구제에 관련된 권위는 집사회가, 그리고 교회가 위임한 일들에 대한 의결권은 제직회가 가지며 그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보고와 승인에 대해서는 전체 교인들의 회인 공동의회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1) 당회
        당회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영적인 분야를 맡은 직분자들인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당회는 당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집사회에 보고할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회의 중요결정사항을 제직회와 공동의회에 공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당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중 하나는 말씀연구와 성도들을 위한 기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회는 목사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성도들을 말씀으로 지도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올바른 말씀이해가 전제될 때 장로는 목사의 설교에 대한 논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가운데서 각 성도들을 심방하며 파악하게 된 형편들을 기도제목으로 함께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배경으로 성례와 권징사역에 관한 논의를 하며 교회를 말씀으로 세워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당회는 성례를 위해 준비하는 일을 담당한다. 성찬식을 위한 떡과 포도주를 준비하며, 세례와 유아세례 베풀 성도를 확인하며 그들에 대한 교육과 문답을 담당한다.
  
     (2) 집사회
         집사회는 당회로부터 독립된 기관이다. 교회의 재정과 교회적 구제에 관련된 집사회의 논의와 결의는 당회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는 집사회의 직분을 당회가 맡긴 것이 아니라 교회의 회중이 맡겼기 때문이다. 집사회의 논의사항을 당회에 달리 보고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은, 당회가 당회의 결의사항을 집사회에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집사회와 당회가 상호 대화 및 교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회와 마찬가지로 집사회가 독립적인 기관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집사회는 모든 의결사항과 실천사항을 제직회에 보고하여 확인과 인증을 받아야 한다. 당회원들은 당연히 제직회에 속해 있으므로 제직회를 통해 문제를 지적하며 감독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다. 집사회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잘 살핌으로써 그들의 의식주에 관련된 삶에 어려움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나아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궁핍이나 고통에 대해서도 적절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집사회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관련된 내용들을 나누며 기도하게 된다.    
   
    (3) 제직회
       제직회는 교회가 맡긴 직분자들의 전체적 대의기관이다. 그 회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 등 모든 직분자들이 함께 모여 영적인 일과 더불어 일반적인 교회의 형편들을 나누며 교회의 행사들과 제반 사항들에 대한 논의를 하며 의결하게 된다. 그리고 당회나 집사회에서 행해진 일반적인 중요한 사항에 대한 보고를 받고 논의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제직회를 통해 교회에 필요한 새로운 문제들을 논의하기도 하고 전반적인 교회 행사들에 대해 검증하기도 한다. 목사, 장로, 집사들의 모임인 제직회는 교회의 전반적인 일반 사항들에 대해 논의하는 직분자들의 최고 의결기관인 셈이다. 즉 당회와 집사회가 전문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제직회는 일반 직분적 의결기관이라 할 수 있다.       

    (4) 공동의회   
        공동의회는 직분자 회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사항들에 대한 최고 의결기관이다. 교회에 속한 모든 입교인들이 공동의회 회원이 되어 질의하고 의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성도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의무를 감당하게 된다. 공동의회는 교회 회중이 목사와 장로로 세워서 맡긴 당회의 일과 집사를 세워서 맡긴 집사회의 일, 그리고 제직회의 일들에 대해 보고를 받고 승인하는 기관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직분자 회인 당회의 권위가 가장 소중하며, 일반적인 논의에 있어서는 공동의회가 가장 중요한 최종 의결권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교회가 단순한 민주적 회합체가 아님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Ⅳ. 결론 

   우리는 위에서 직분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거룩한 방편으로서 얼마나 소중하며, 그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서는 각 직분이 크게 오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각 직분자들이 자기 직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직분자들의 회인 각기관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목사가 집사회에 맡겨진 직분을 마치 자기에게 부여된 권리인 양 행사하고 있는가 하면, 장로는 마땅히 감당해야 할 자기의 직분 사역을 시행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재정에 관련된 집사의 직분을 대신하고 있다. 집사들은 마땅히 감당해야할 자기의 직분을 다른 직분자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자기의 직분 사역을 태만히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모든 직분은 형식적으로만 남게 될 뿐 그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는 한국교회에서 발생하는 엄연한 현실이다. 
  나아가 특정 직분자들은 다른 직분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권위주의적으로 다른 직분을 유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의도적이라기 보다 잘못된 무지에 의한 한국교회의 관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지로 인한 관행이 교회의 올바른 직분이행을 가로막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각 직분자들이 다른 직분의 경계를 넘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는 사실 대다수 교단 헌법들이 이미 명시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의 직분에 대해서는 이제 말씀의 원리에 따라 새롭게 정리해야 하며 각 직분들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강도사, 서리집사 등 더 이상 불필요한 직분들은 과감하게 폐지할 수 있어야 하며, 공로목사, 원로장로 등 명예직분은 당연히 없애야 한다. 나아가 당회장을 중심으로 권력 구조화되어 있는 부목사 제도 역시 계급적 성격을 띤 제도로서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직분자가 사임하거나 퇴직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반성도로 돌아가야 한다. 특히 목사의 경우 퇴직후 더 이상 목사직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아직도 목사라 생각하고 있다면 교회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각 직분회를 분리해야 한다. 즉 한국교회의 <당회, 제직회> 두 직분회를 <당회, 집사회, 제직회> 세 독립된 직분회로 분리해야 한다. 그리고 각 직분회는 다른 직분회를 주 안에서 존중해야 하며 그 직분들의 최종적인 기초가 되는 전체 회중의 공동의회를 염두에 두고 맡겨진 직분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직분자를 말씀의 원리에 좇아 올바르게 선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성도들이 말씀의 터 위에서 성숙해야만 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숙하지 못한 교회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올바른 직분자 선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직분은 자기의 취향에 의해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회중이 기도 가운데 각 성도들의 은사를 확인해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개인적 성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직분을 맡긴 교회의 의사에 따라 직분을 수행해야만 한다. 교회의 여러 직분들 간에 상호 균형이 맞는 가운데 직분적 사역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며 전체교회에 봉사해야 한다. 각기 다른 직분을 가진 성도들은 상호 존중하는 마음과 함께 건전한 견제기능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허물어져 가는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수행이 절대로 필요하다. 교회는 말씀과 고백에 합치하는 방법으로 직분자를 세워야 하며, 세움을 받은 직분자들은 교회가 말씀을 근거로 맡긴 직분을 성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다양한 직분들 사이에 경계가 없이 혼합되어 있거나 계급적 경향으로 인한 치우침은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올바른 직분제도의 확립을 통해 원래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직분에 대한 올바른 회복 없이는 한국교회의 개혁도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조직신학연구, 제6호, 2005년 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