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28 16:48
칼빈의 제네바교회 교리문답 (1542)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 JOHN CALVIN
시작하는 말
본 교리문답서는 1542년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제네바 교회에서 자녀들과 새신자의 성경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던 교리문답서를 번역한 것으로 또한 참고로 장로교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 오던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추가로 편집한 것이다.
우리는 칼빈의 이 교리문답 교육을 통해 성경을 더욱 체계있게 배우고, 성경의 권위와 절대성을 바로 알기 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존경과 권위를 믿고 순종할 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교리교육의 중요성은 본 교리문답서를 작성한 칼빈이 그 서문에 언급한 내용을 보면 이를 더욱 확신 할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어린이들을 주의 말씀과 성경의 교리로 양육하라는 특별한 권면을 받아 왔습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교회는 성경학교 뿐 아니라, 성도들 각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잘 가르치도록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주요 교리에 대해 어린이들이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공적 규정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효과 있게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교리문답이라는 특별한 규범을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온갖 핍박으로 교회를 흩어 폐허로 만들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회에 어떤 은혜의 표징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교회의 거룩한 규범들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사탄이 교회에 남겨놓은 것은 교화능력이 전혀 없고 단지 미신만을 산출해 낼 수 있는 몇 가지 유물들에 불과합니다.(로마 가톨릭교회)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 교회 안에 왜 내적인 변화는 없고 허식만이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정통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여기서 제시하는 이 교리문답은 옛적부터 성도들 가운데 지켜져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교리문답을 통해서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며, 또한 중요한 부분을 잘 이해해서 성경 전체를 풍성하게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세우신 이유는 말씀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며 여호와의 일들을 잊지 않고 소망을 갖고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신 4:9,10)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78:1-8)
칼빈의 제네바 교리문답 작성 배경
1. 서 론
칼빈은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불씨를 전 유럽과 전 세계로 퍼뜨린 개혁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칼빈의 개혁운동과 사상의 중심에는 제네바시가 있었고, 그곳에서 그의 개혁적인 교리와 교회정치가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제네바 사역 초기에 칼빈은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 신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 개혁에 대한 불타오르는 의지는 제네바 시(市) 전체를 말씀을 통한 철저한 개혁의 토대위에 세워놓았다. 그러면 칼빈이 제네바 시(市)에서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이 글에서 그 이유가 시민들의 개혁신앙을 굳게 세워주는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그리고 이를 철저히 실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고자 한다.
2. 칼빈의 제네바 사역과 교리문답서
1536년 칼빈이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가게 된 것은 계획 된 것이 아니었다. 스트라스부르그로로 가던 칼빈은 전쟁으로 길이 막히자 제네바를 거쳐 우회하여 가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제네바에는 기욤 파렐이 개혁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제네바에 기독교강요의 저자 칼빈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칼빈을 찾아갔다. 그리고 제네바 시(市)의 개혁에 함께 해줄 것을 간청했다. 칼빈은 당시 25세의 젊은 신학도에 불과했으나 파렐은 기독교강요를 통해 그의 잠재력을 본 것이다.1)
칼빈은 자신의 무능과 자기가 할 일들을 열거하며 파렐의 간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파렐은 물러서지 않고 만약 칼빈이 자기 간청을 끝까지 거절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제네바 시(市) 개혁을 이끌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은 파렐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결국 칼빈은 파렐의 간곡한 간청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칼빈의 역사적인 제네바 시(市) 신앙개혁이 시작된다.
1536년 8월 파렐의 요청에 의해 칼빈이 제네바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 도시는 무엇 하나 정비된 것이 없었다.2) 파렐의 치열한 투쟁으로 교황의 추종자들이 제네바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개혁파 도시와 교회로서 법과 질서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칼빈의 말은 당시 제네바 시(市)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가를 보여준다. “내가 이 교회에 처음 당도하였을 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설교는 하였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우상을 찾아내어 불태우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신앙의 다른 개혁운동은 없었다. 도시의 모든 것이 그저 혼돈 상태에 놓여 있었다.”3)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당장 모든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웬일인지 그는 제네바에 도착하면서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마도 새로운 환경에서 개혁의 사명을 받고 실제적으로 이를 실현해야한다는 부담감과 불안감 등이 작용한 것 같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첫 사역은 파렐의 지도아래 제네바교회 설교였다.4)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시(市) 의회로부터 칼빈이 설교자로 인준(認准)을 받는 일이었다. 그래서 파렐은 칼빈을 위해 제네바 시(市) 거주권과 사역비 책정을 시(市) 의회에 청원했는데, 일 년 후인 1537년 2월 13일에야 통과된 것으로 보아, 제네바 시(市)는 젊은 이방인 칼빈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칼빈의 궁핍한 생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칼빈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설교에만 전념했다. 이런 칼빈의 태도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점차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또한 칼빈은 제네바 시(市)의 당면 과제에 대한 중요한 제안을 내놓는 등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 결과 1537년 11월에는 목사회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칼빈은 남다른 실천력으로 제네바 시(市)가 철저한 개혁신앙의 틀을 유지토록 노력했다. 그는 학문적이고 이론적 지식뿐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제네바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 목회자였다. 그의 이런 개혁의 추진력의 근원은 바로 그의 열정적 신앙에 있었다. 어떤 이들은 칼빈의 제네바 개혁의 성공이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제네바 생활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요구하는 칼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은 먼저 교회가 질서를 바로 세울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 제네바 시(市) 전체가 안정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사회개혁의 시작과 완성이 교회의 신앙회복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市) 의회를 향한 칼빈의 강력한 요구 중 하나가 바로 ‘신앙고백’이었다.
1536년 11월 발표한 이 신앙고백서는 총 21개의 주제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칼빈은 이 신앙고백서에 모든 제네바 시민이 서명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아직 지지 기반이 미약한 칼빈의 이 같은 강력한 개혁 추진은 반대를 몰고 와 결국 부결되었다. 이것은 젊은 목회자의 개혁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칼빈은 1537년 1월 ‘교회조직과 예배를 위한 지침서’를 작성했다. 여기서 그는 매월 성찬을 거행할 것과 교회의 권징을 철저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며 이는 교회의 책임이라고 강조 했다. 이것은 칼빈이 얼마나 교회의 순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지침서는 성찬을 일 년에 네 번 시행하기로 하는 등의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시(市)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칼빈은 또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요약한 ‘요리문답서(신앙교육 요강과 신앙고백서)’5)를 제안했다. 이 또한 성경대로 제네바 교회를 권징과 교리교육으로 정화시키고 순결을 유지하려는 칼빈의 노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1537년 2월 칼빈은 제네바 시민 모두가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에 서명하고 그대로 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칼빈의 이 같은 급진적인 요구와 강력한 추진은 오히려 시(市) 의회의 반발을 샀고, 결국 이 일로 칼빈은 일 년 뒤 제네바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된다. 제네바에서 추방 된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3년간 머물고 있는 동안 제네바 시(市) 의회는 칼빈이 주장한 개혁의 필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네바 시(市)의 일 년여의 구애 끝에 칼빈은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다. 칼빈은 첫 번째 제네바 사역에서 다하지 못했던 교회 개혁을 두 번째 사역기간 동안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제네바 개혁운동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게 된다.
교회의 순결을 항상 강조하고 중요시 했던 칼빈은 이것이 자녀교육에서 부터 구체적으로 시행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자녀들에게 ‘신앙개요’를 가르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칼빈은 1542년 최초로 어린이를 위한 요리문답서를 만들어 매주일 가르치게 하였다. 교리교육에 대한 그의 결심의 확고함을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돌아온 후, 나는 교리문답을 서둘러 마련하였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을 약속하지 않는 다면 이 직분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즉 교리문답과 교회규율의 지지이다.”6) 이는 칼빈이 얼마나 교리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며, 또 칼빈의 제네바에서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교리문답서’와 ‘신앙고백’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칼빈은 이제 제네바를 점점 장악해 가기 시작했다. 맥닐은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세상적인 잔꾀를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기초에 뿌리박은 원칙에 타협 없이 헌신하고 또한 오랜 세월동안 그 원칙들을 낙심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옹호한 결과이다.”7)
3. 칼빈의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서
제네바 교회와 칼빈이 작성한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칼빈은 철저한 신조와 교리 교육을 통해 교회 개혁을 실천해 갔으며, 그것은 또한 교회 순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강요의 영문 번역자 포드 배틀즈에 따르면, 기독교강요의 처음 의도는 교리문답서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칼빈이 교리문답의 중요성을 항상 인지하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8)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 있어서 칼빈 시대의 교회처럼 교회 개혁과 순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현대 상황에 맞는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의 개발과 더불어 교리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이 사용했던 신조와 교리문답서를 살펴보는 것은 현대 교회가 개혁신앙의 전통을 어떤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1) 제네바 신앙고백서(1536)9)
앞서 지적했듯이 칼빈은 교회 내의 질서와 순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온 교회가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헤셀링크에 따르면 칼빈은 질서 있는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 가지는 ‘신앙고백’ ‘교회헌법’ ‘교리문답’이었다.10) 칼빈이 그 첫째를 신앙고백으로 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칼빈의 신앙고백은 복음을 따르는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따르는 자들과 교황의 왕국에 속기를 더 사모하는 자들이 어떻게 다른가를 분명하게 들어낸다. 다시 말해 제네바 교회는 아직까지 교황파와 개혁파간에 잠재해 있는 싸움이 남아있기 때문에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모든 성도가 확실한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단순히 이 둘 사이를 구별 짓는 것뿐 아니라, 신앙고백을 통해 지상에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중요한 지표가 되며,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거룩성과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웬델도 같은 접근을 한다. “긍정적인 면에서 볼 때 교회의 임무는 가능한 모든 성경적 방법을 통해 교회 구성원들의 점진적인 성화에 기여하는 곳이며, 또한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교회의 임무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축출하는 권리를 갖는 것이다.”11) 칼빈의 제네바 교회를 향한 이 신앙고백서는 당시 상황에선 매우 강력한 요구였다. 아직 개혁파가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칼빈의 이 고백서는 시(市) 의회에서 유보되었다.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제네바의 모든 시민들과 거주자들과 이 지방의 모든 권속들이 반드시 지키며 준행하기로 서약해야만 한다.” 21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대로 살 것,
2)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 예배 할 것,
3) 우리는 자연인으로서 철저히 무능력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나님 의 의로우심에 순종 할 것,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기독교강요에서 보듯이 칼빈 신학에서 중요한 강조점 중에 하나가 기도이다. 이 고백서뿐 아니라 뒤에 다룰 모든 교리문답서 그리고 그의 기독교강요에도 기도에 관한 조항은 빠지지 않고 들어있다. 칼빈은 말한다. “기도가 만일 가슴의 내적 감동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증한 것이요 환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기도를 분명히 이해하고 드려야만 한다.”(13) 또한 칼빈은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성지순례, 수도원제도, 음식의 차별, 결혼의 금지, 고해성사 등을 사탄의 타락한 교리로 치부하고 저주했다. 18)
칼빈은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권징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신앙고백서에 ‘출교’ 조항을 만들었다. 그 이유는 “사악한 자들이 우리 주님의 선하심과 명예를 더럽히는 저주받을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자만심에 빠질지라도 그들이 회개하도록 돌아서게 할 것이다.”19) 그 이외에도 사역자들과 국가의 권세 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 칼빈의 첫 번째 교리문답서
(원제 :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서, 1537)12)
불과 몇 개월 전에 만든 신앙고백서가 시(市) 의회에 의해 아쉽게 거부되었지만 그럼에도 칼빈은 개혁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신조’와 ‘교리문답’이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몇 개월 후인 1537년 1월에 다시 1536년 판 신앙고백서를 더욱 보강하여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이라는 교리문답서를 내놓았다. 이 교리문답서는 1536년판 기독교강요를 요약한 것이었다. 칼빈이 여기에 중점을 둔 이유는 성도가 꾸준한 양육과 교육을 받을 때 신앙을 바르게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보다 훨씬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 교리문답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도 ‘신앙고백’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데, 칼빈의 교회 개혁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지를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에 속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신앙고백을 공적으로 선언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교리문답서는 카롤리가 로잔에서 칼빈과 그의 동료들을 아리안주의자라고 혐의를 씌운 것에 대하여 공적으로 변증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13) 1537년 2월 모든 제네바 시민이 이 교리문답서에 서명하도록 정해졌다. 칼빈은 이런 신앙교육을 통해 교회의 일체감과 통일성을 시도했다. “이런 신앙고백의 통일을 바탕으로 칼빈은 복잡한 사상들이 뒤섞여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제네바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개혁자 칼빈의 노력과 열정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던 일부 극 보수주의자들과 더 과격한 개혁을 원하는 진보주의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내외적으로 반발을 사게 되었다.”14)
그래서 이것은 목회 현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불과 1년 후인 1538년 4월 칼빈으로 제네바를 떠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이 첫 번째 교리문답서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너무 어려운 용어로 쓰여 졌고, 주제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이 제네바에서제 2기 사역을 시작 후 곧바로 더 쉽고 이해하기 쉽게 수정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1542년판 어린이를 위한 요리문답서이다.(개혁신앙 27호 부록) 그러나 최근 들어 칼빈주의 학자들에게 첫 번째 교리문답서의 가치가 재인식되고 있다. 첫 번째 교리문답서가 칼빈의 신학 특히 기독교강요의 요약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15) 헤셀링크는 방대한 기독교강요를 다 읽을 만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칼빈의 사상을 소개하는 간략하고, 명확하며, 간결한 입문서라고 말한다. 폴 푸만은 또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단시간에 기본적이고 명확한 핵심을 제공하기 때문에 칼빈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16) 기독교강요의 영문 판 출간 편집장을 맡았던 맥닐은 이렇게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첫 번째 교리문답서는 압축 미와 단순성에 있어 걸작이며, 칼빈의 사상 이해를 위한 최상의 열쇠이다.”17)
이 첫 번째 교리문답서는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루터의 요리문답서의 기본적 골격을 가지고 온 것으로, ‘율법’ 조항 다음에 ‘믿음’ 조항 그 다음에 ‘기도’와 ‘성례’에 대한 조항이 오는 점이 비슷하다. 그러나 칼빈의 교리문답서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서 국가의 질서로 끝을 맺고 있는 점은 루터와 전혀 다르다. 그 내용은 기독교강요의 초판과 마찬가지로 율법(십계명), 신앙(사도신경), 기도, 성례, 교회와 국가의 질서 순으로 되어있다. 이 교리문답서의 신학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첫 번째 조항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들은 이 덧없고 짧은 인생이 영원불멸에 대한 명상 이외의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강조는 매우 중요하고 다른 개혁자들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이 주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선택과 예정’이 교리문답서에 간략하게 설명되고 있음은 매우 독특한 점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이 점진적으로 개발되는 과정에 있으며, 기독교강요 최종판으로 오면서 이 교리에 대한 개발이 완성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3) 칼빈의 두 번째 교리문답서
(원제 : 제네바교회 교리문답, 1542)18)
칼빈은 1541년 제네바 사역자들의 간청에 못 이겨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자마자 그가 착수했던 것은 바로 제네바 시민들이 자신이 만든 신앙고백서와 예배모범을 받아들이고 그 내용대로 실천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에 만든 첫 번째 교리문답서가 너무 어렵고 실제 목회 현장에서 사용하기가 어려웠음을 깨닫고, 스트라스버그에 체류하는 동안 만났던 부처가 사용하고 있던 ‘간략한 교리문답서’의 영향을 받아 1537년판과는 다른 방식의 문답식의 교리문답서를 발행하게 된 것이다. 이 교리문답서는 가장 위대한 개혁주의 신조라 일컬어지는 우시누스(Ursinus)와 올레비아누스(Olevianus)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1563)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개혁주의 신조의 모범이 되었다.19) 이 교리문답서는 제네바 교회에서 매우 비중 있고 엄격한 실천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교리문답 교육에 불응할 때는 징벌이 가해질 정도였다. 어린이들은 일정기간 동안 교리문답 교육을 받고 공회 앞에서 증명을 한 후에 입교가 허락되었다. 이는 칼빈이 신앙교육과 교회의 순수성 유지에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칼빈의 이 교리문답서는 프랑스 내에 있는 개혁교회들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으며, 칼빈 신학의 보급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0) “각 교회에서는 매주일 이를 교재로 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1594년 몽또방에서 열린 개혁교회 총회에서는 교회 내에서 칼빈의 교리문답서 이외의 또 다른 교리문답서 작성을 금지시키는 결의안이 채택되기도 했다.”21)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가 나오자 칼빈 것은 소원해졌다. 이유는 칼빈의 두 번째 교리문답서가 첫 번째 것보다는 쉽다 해도, 아직도 교의학적인 색채를 많이 띠고 있어서 목회 현장에서 특히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번째 교리문답서는 첫 번째 교리문답서와 내용면에서는 거의 일치하나 다른 점은 중세의 전통적인 교리 교육서처럼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목사 : 인생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
아이 :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교리문답서의 서술식 문장을 질문과 대답으로 바꾼 것이다. 이 교리문답서의 신학적 특징은 선택과 예정에 관한 조항이 생략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주제가 어린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교회와 국가의 질서에 관한 것도 생략되어 있다.
4. 결 론(의의와 평가)
이상으로 우리는 칼빈이 제네바 사역을 시작하면서 도입했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서의 작성 배경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칼빈은 제네바 시(市)와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교리교육을 통한 철저한 개혁정신의 함양에 있었다. 그가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교육에 그 무엇보다도 철저했던 것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세속화에 휩싸인 급박한 상황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며 스스로도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를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세상은 갈수록 강력한 유혹의 도구로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있기에, 교회 또한 성도들을 성경대로 굳건한 신앙의 토대위에 세우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어린이와 성인들의 지속적인 교리교육에 있다.
세계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교회적 상황에 맞는 성경적인 신조를 작성하여 교회의 순결을 지키려는 이때에 유독 한국교회 특히 보수적 교회들은 교회 성장과 부흥이라는 주제에만 매몰되어 교리교육은 소외되고 있고, 그러는 사이 한국교회는 빠르게 세속화 되어가고 있어 준동하는 이단들에 의해 교회의 순결을 잃어가고 있음이 참으로 개탄스럽고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출처: http://www.thetruthlighthouse.org
< 참고문헌 >
1) Barth, Karl, The Theology of John Calvin, trans.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 Eerdmans, 1995.
2) Battles, Ford, “서문”,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서울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8.
3) Calvin, John, .구약성경주석 – 시편, vol. 7., 서울 : 성서교재간행사, 1980.
4) ___________ , .깔뱅의 요리문답. 한인수역, 서울 : 도서출판 경건, 1995.
5) Hesselink, John, Calvin’s First Catechism : A Commentary, Louisville :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6) McNeil, John T.,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정성구, 양낙흥 공역, 서울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0.
7) Wendel, Francois, .칼빈의 신학 서론.,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서울 : 기독교문화협회,1992.
8)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서울 : 이레서원, 2001.
< 미주 >
1)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 시편, vol. 7.,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0) p. 162.
2) 칼빈이 제네바에 처음 도착한 것은 1536년 7월이지만, 정식으로 사역을 시작한 것은 8월부터 이다. 왜냐면 바젤로 다시 돌아가 자신의 일을 마무리 하고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3) Opera IX:891-892,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서울: 이레서원, 2001) p. 210에서 재 인용.
4) 지위의 명칭은 제네바 교회의 “성경봉독자”였다. 이것은 친구들에게 보낸 서신의 첫머리에 칼 빈 자신이 사용하였다.
5) 자세한 내용은 3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6) Opera, IX:894.
7) 죤 T.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정성구, 양낙흥 공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1990), p. 213.
8) 포드 배틀즈,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역자 서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8), p.43.
9) 국문 전문(全文)은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pp. 228-236을 보라.
10)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 A Commentar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 39.
11) 프랑시스 웬델, .칼빈의 신학 서론.,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서울: 기독교문화협회,1992), p. 60.
12) 국문 전문(全文)은 한인수역 .깔뱅의 요리문답. (서울: 도서출판 경건, 1995)을 보라.
13) Karl Barth, The Theology of John Calvin, trans. by Geoffrey W. Bromiley,(Grand Rapids: Eerdmans, 1995), p. 271.
14)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p. 249.
15)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 A Commentary, p. 41.
16) Ibid.
17) 죤 T.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p. 162.
18) 국문 전문(全文)은 한인수역 .깔뱅의 요리문답. (서울: 도서출판 경건, 1995)을 보라.
19) Karl Barth, The Theology of John Calvin, p. 271.
20) 프랑시스 웬델, .칼빈의 신학 서론., p. 92.
21) 한인수, op. cit.,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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