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역이라는 개념의 사상적 바탕을 이룬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으로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를 대표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특히 프란시스 쉐퍼의 경우에는 한국의 개신교 내에서 문화사역이라는 붐을 조성하는데 가장 큰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운동이나,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모두 몰락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기독교가 문화를 변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의 문화가 기독교를 변질시켜버린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상들은 모두 칼빈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를 바탕에 두고 있는데, 특히 존 칼빈의 ‘제1차 교리교육서’(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 1537)에서 다루는 초반부의 주제들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내용과 이러한 이해의 바탕에서 시작하는 “참 종교와 거짓 종교 사이의 차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 등에 대한 오해와 오류였다고 볼 수 있다.
존 칼빈의 ‘제1차 교리교육서’ 제1장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함이 마땅하다고 언급함으로써 그 지식을 막연한 신적 대상에 대한 추구(종교심)로 그치지 말도록 언급하고 있다.
결국 존 칼빈은 그 적용 대상을 기독교 신자들만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문화사역을 통해서 기독교회의 울타리를 낮추는 명분이 되도록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신앙과 지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존 칼빈은 보편성을 언급함에 있어서 항상 인간의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보편구원이 아니라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고스란히 인정된다. 한마디로 예정에 대한 이해는 보편적이지만 그 구체적인 적용은 분명히 제한적으로 택자들에 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믿고 확신하는 신앙의 도리로 선 기독교회는 ‘보편적’인 것으로 존재하되 결코 낮은 울타리로만 둘러있는 것이 아니라, 굳건하고 견고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울타리로 둘러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취해야 할 ‘칼빈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