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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교회와 신앙교육

2015.01.21 15:54

SDG 조회 수:2584

제네바 교회와 신앙교육
--칼뱅의 제1차, 제2차《신앙교육서》를 중심으로--

             안상혁 (역사신학 조교수)

I. 서론

    칼뱅은 《제네바 신앙교육서 (교리문답서) Catechismus Ecclesiae Genevensis》를 그의 제네바 종교개혁에 있어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매김 하였다. 신앙교육서에 대한 칼뱅의 강조는 “하나님의 교회는 신앙교육서 없이는 결코 보존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그의 진술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541년, 칼뱅이 제네바로 돌아와 줄 것을 간청하는 시의회는 앞으로 신앙교육과 권징을 성실하게 실천할 것을 약속한 후에야 비로소 칼뱅의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과연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칼뱅은 《신앙교육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 목적은 무엇인가?”, “제네바의 교회개혁을 위해 칼뱅이 사용한 《신앙교육서》의 방법론과 내용, 그리고 특징은 무엇인가?”, “과연 칼뱅의 《신앙교육서》를 오늘날 한국교회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필자는 본고를 통해 상기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오늘날 칼뱅의 《제네바 신앙교육서》를 주된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박사 논문 혹은 단행본 수준의 연구서들은 다른 분야에 비해 의외로 적은 편이다. 1905년에 발표된 마크 뵈그네 (Marc Boegner)의 “칼뱅의 신앙교육서들 연구” (Les Catéchismes de Calvin) 이래, 주목할 만한 저작들로는 제2차《제네바 신앙교육서》(1542/45)에 대한 칼 바르트(Karl Barth)의 주해서(1967)와 1998년에 출판된 존 헤셀링크 (I. John Hesselink)의 제1차 《제네바 신앙교육서》(1537/38)에 대한 주해서를 언급할 수 있다. 바르트는 제2차《제네바 신앙교육서》가운데 사도신경에 대한 칼뱅의 교리문답 부분만을 따로 구분하여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주해하였다. 헤셀링크의 주해서는 일찍이 포드 L. 베틀즈 (Ford Lewis Battles)가 라틴어 판본 (1538년 칼뱅에 의해 출판됨)을 영어로 옮긴 본문에 헤셀링크가 자신의 주해 강의를 덧붙여서 출판한 것이다. 특히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통해 《제네바 신앙교육서》의 각 항목을 요약적으로 조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소논문 수준의 연구물을 출판한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피터 드 종 (Peter Y. De Jong), 조셉 홀 (Joseph Hall), 로돌프 피터 (Rodolphe Peter), 아드리안 퐁트 (Adriaan D. Pont), 마크 악터마이어 (Mark Achtermeier), 올리비에 밀레 (Olivier Millet), 에릭 카야얀 (Eric Kayayan), 제임스 맥골드릭 (James E. Goldrick), 로버트 킹던 (Robert M. Kingdon) 등이 있다. 한편 칼뱅은 교회교육과 더불어 일반 공교육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둘 사이의 긴밀한 공조를 강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예시되었다. 이 분야를 연구한 현대의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스탠포드 리드 (Stanford, W. Reid), 리처드 스타우퍼(Richard Stauffer), 캐린 마그 (Karin Maag)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칼뱅이 작성한 두 편의 《신앙교육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한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최도형, 한인수, 이형기, 박경수, 조용석 등이다. 제1차 《신앙교육서》(1537/38)는 최도형, 한인수, 이형기, 박경수에 의해, 제2차 《신앙교육서》는 한인수와 조용석에 의해 각각 불어(1542)와 라틴어(1545) 원전으로부터 번역되었다. 특히 한인수는 두 종류의 《신앙교육서》를 모두 한글로 번역하여 단권으로 출판하였다. 칼뱅의 《신앙교육서》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국내의 선행 연구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정일웅의 “칼빈의 교리교육과 제네바 신앙교육서 연구”(1988), 정준모의 《칼빈의 교리교육론》(2004), 그리고 문병호의 “교리와 교육: 칼빈의 제1차 신앙교육서”(2009) 등이다. 이 가운데 정준모의 《칼빈의 교리교육론》은 칼뱅의 《신앙교육서》에 대한 단행본 수준의 국내 연구서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칼뱅의 교회교육을 루터의 그것과 흥미롭게 비교한 양금희의 연구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상기한 2차 문헌들을 통해 부각된 몇 가지 흥미로운 주제 혹은 쟁점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칼뱅의 제1차《제네바 신앙교육서》와 제2차《제네바 신앙교육서》사이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관한 논의이다. 칼뱅은 신앙고백서의 형식을 취한 제1차 《제네바 신앙교육서》와 달리 제2차 《제네바 신앙교육서》의 경우는 “문답” 형태로 기록하였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도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예정론”의 경우 제1차 《제네바 신앙교육서》는 그 교리를 명시적으로 다룬 반면에 제2차 《제네바 신앙교육서》는 예정론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과연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다른 쟁점으로 칼뱅의《제네바 신앙교육서》와 루터의《대/소요리 문답서》사이의 관련성에 관한 논의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칼뱅의 제1차《제네바 신앙교육서》는 그 형식과 주제에 있어 루터의《대/소요리 문답서》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주요한 차이점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제2차 《제네바 신앙교육서》는 기존의 “십계명-사도신경”의 순서를 바꾸어 “사도신경-십계명”의 순서로 내용을 구성하였다. 특히 루터파의 교회교육과 비교해 볼 때 과연 칼뱅의《제네바 신앙교육서》를 통해 드러난 개혁파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이 외에도 《제네바 신앙교육서》와 《기독교 강요》사이의 관계, 또한 제2차《제네바 신앙교육서》와 스트라스부르크의 부처(Bucer)가 작성한 《신앙교육서》와의 관련성, 그리고 칼뱅의《제네바 신앙교육서》에 대한 평가 등과 관련한 주제들이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상기한 모든 쟁점들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제네바 교회의 신앙교육과 칼뱅의《제네바 신앙교육서》를 개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본고의 주된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상기한 쟁점들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본고의 논의가 상기한 주제들과 연관성을 맺는 경우에는 필요에 따라 주요 쟁점에 대한 간략한 논평을 시도할 것이다.

II. 역사적 배경
   
1. 종교개혁과 교육개혁: 성직자 교육
   종교개혁은 교육개혁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성직자의 주된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사제가 미사와 성례를 집례 했다면 개혁된 교회의 성직자들은 주로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쳤다. 설교자로 훈련받기 위해 예비 성직자들은 성경 원어를 학습해야했다. 또한 복음을 설득력 있게 변증하기 위해 그들은 인문학적인 소양과 수사학적인 훈련도 받았다. 종교개혁 초기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은 루터와 멜랑히톤의 지도아래 성경과목과 성경원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교과과정 개편을 신속하게 진행하였다. 이것은 성경말씀과 관련하여 보다 실력을 갖춘 성직자를 배출하기 위한 개혁이었다.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울리히는 루터파의 신앙을 받아들인 후 튀빙겐 대학의 교과과정을 개혁했다 (1536년 11월). 1558년 12월, 팔츠의 선제후 오토 하인리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모델을 참고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과과정을 개편하였다. 종교개혁의 원리에 따라 학제를 개편한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 수는 해마다 증가했고, 이에 따라 고등교육을 받은 성직자의 수 역시 급속하게 증가했다. 마틴 브렉트의 연구에 따르면 16세기 말까지 뷔르템베르크의 루터파 성직자들 가운데 약 75%가 튀빙겐 대학을 졸업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팔츠의 루터파 성직자들 가운데 약 86%가 대학교육을 받았고, 제임스 키텔슨에 따르면, 스트라스부르크 성직자의 73.5%는 학사 이외에 석사학위까지 소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중세 말 독일의 사제들 가운데 대학교육을 받은 비율이 40% 이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면서 종교개혁 이후 루터파의 성직자들이 “지적 엘리트 계급”으로 격상했다고 말한 박준철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물론 대학 졸업자의 비율로 개신교 성직자의 교육 수준을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캐린 마그가 옳게 지적한 대로 모든 개신교 신학 교육기관들이 학위를 수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1560년경에 이르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고수한 기존의 대학들에서 개신교인들은 사라지게 된다. 로마 가톨릭의 편에 선 대학들이 개신교인들의 입학을 거부한 이유도 있었고, 개신교인들 스스로 로마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는 학교를 회피한 이유도 컸다. 한편 개신교 성직자를 배출하기 위해 새롭게 대학을 건립하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학을 세우고 학위를 수여하기 위해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나 교황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개신교 신앙을 수용한 지역 안에 있는 대학들의 경우는 기존의 학위들을 과거와 같이 지속적으로 수여할 수 있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종교개혁의 원리에 따라 커리큘럼을 개편한 후 개혁된 신앙으로 무장된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취리히, 스트라스부르크, 제네바 등과 같은 도시에 새롭게 건립된 개신교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학위수여를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추천장”을 통해 졸업생들이 사역지를 구할 때 도움을 제공하였다. 칼뱅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제네바 아카데미도 이 경우에 해당했다. 그러나 학위수여가 없었음에도 유럽 전역으로부터 많은 학생들이 제네바 아카데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신학수업을 받았다. 이것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진 성경연구와 신학 수업 그리고 학문적 훈련이 당시 다른 대학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2. 종교개혁과 제네바 교회  
   1530년경에 이르면 종교개혁이 초래한 변화들이 제네바 안에서도 쉽게 감지되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이 시작될 무렵 제네바 시와 인근 농촌지역의 인구는 약 일만 이천 명을 상회하는 규모였다. 제네바는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표방하는 도시로서 최소한 32명의 성당 수사신부와 여섯 개의 수녀원, 그리고 다섯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보이 왕가와 도시민 사이의 뚜렷한 갈등 구조가 존재했다. 특히 15세기 중엽부터는 사보이 가문이 종교와 정치 모든 분야에서 영향력을 증대시키면서 도시민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보이 가문은 칼뱅 사후에도 1602년까지 제네바 도시의 자치권은 물론 개혁교회와 제네바 아카데미까지 억압하며 개신교를 무력화시키고 도시 전체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장악하고자 시도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기시작하자 제네바 시민은 개신교 신앙을 수용한 후에 사보이 가문과 동맹관계에 있는 주교와 투쟁하였다. 그들은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인 베른 도시의 지지와 개혁자 기욤 화렐 (Guillaume Farel)의 지도하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1532년 말 공개토론회가 개최되었고, 1533년 초부터는 개혁신앙에 따른 예배와 성례가 시행되었다. 1534년에는 도시 전 지역에서 우상파괴운동이 일어났고, 감독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주요 수도원들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그 결과 1535년 10월에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연말까지는 도미니크와 프란시스 수도회를 포함한 주요 수도원들이 문을 닫았다. 요컨대 1535년 말까지 제네바는 (공식적으로)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도시에서 종교개혁 도시로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도시 전체의 종교개혁을 각 교구 단위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중세의 교구조직은 그대로 보존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각 교구에서 개혁된 신앙을 교구민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충분한 수의 성직자를 공급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1544년까지도 적지 않은 수의 교구들은 옛 사제들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했다. 더구나 일련의 정치적인 혼란으로 화렐과 칼뱅이 추방되었던 1538년에서 1541년 사이의 기간은 교구단위의 교회개혁을 지연시키는 주요한 장애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때, 1546년에 이르러서야 각 교구를 포함하는 제네바 도시 전체의 종교개혁이 비로소 안정화되었다고 진단한 윌리엄 내피(William Naphy)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1546년은 칼뱅에 의해 “제네바 목사회” (The Company of Pastors)가 조직화된 해이다. 1546년 이후로는 각 교구를 담당하는 성직자들의 교육수준이 그 이전보다 눈에 띄게 높아졌으며 이와 더불어 성직자들의 사회적이며 경제적 수준 또한 상향되었다. 

3. 교회개혁과 신앙교육: 《신앙교육서》의 저술 목적
   1536년 제네바에 도착한 칼뱅은 화렐의 설득을 받아 제네바 종교개혁에 가담한다. 앞서 소개한 제네바의 정치적이며 종교적 정황을 숙지하게 된 칼뱅은 도시 안에서 진정한 교회개혁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조건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개혁신앙에 의한 체계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이 아직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칼뱅은 교구민과 그들의 자녀들을 바른 교리로 교육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할 신앙교육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칼뱅의 이러한 생각은 1537년 1월 16일 시의회에 제출된 (칼뱅과 화렐에 의해 작성된) 《제네바 교회의 조직에 관한 시안》에 다음과 같이 명문화 되었다.

세 번째 조항은 자녀들에 대한 (신앙)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앙고백은 의심의 여지없이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각 개인을 기독교의 기초 (교리)로 교육시키기 위한 일종의 교리 문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우선 모든 어린자녀들을 교육시키기에 적합한 간단하고 쉬운 기독교 신앙의 요강(要綱)을 마련합니다. 자녀들은 일 년 중 특정한 계절에 목회자들 앞에 나와서 문답시험을 치르고 각자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추가적인 교육을 받되 교육이 충분하게 이루어졌다고 인정될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부모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녀들이 상기한 요강을 열심히 배우도록 신경을 쓰고 또한 공지된 날에 목회자들 앞에 그들의 자녀들을 데리고 오는 일을 성실함으로 감당할 것을 명령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칼뱅은 같은 해에 제1차 《신앙교육서》를 불어로 집필하였다. 모두 33개 항목으로 기독교의 주요한 교리들을 비교적 간략하게 해설하였다. 이듬해 겨울, 칼뱅은 동일한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해서 출판함을 통해 보다 많은 교회들에서《신앙교육서》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제1차 《신앙교육서》는 칼뱅의 기대만큼 활용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칼뱅은 화렐과 더불어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했기 때문이었다. (1538년 4월)  
    3년 후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초청을 받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된다. 본격적인 교회개혁을 착수하기에 앞서 칼뱅은 《교회법규안 Projet D'ordonnances ecclésiastiques》을 작성하여 시의회에 제출하고(1541년 9월) 시의회는 그것을 같은 해 11월에《교회법규》로서 공표한다. 《교회법규》에서 칼뱅은 신앙교육을 담당할 교회의 두 직분을 지적했다. 첫째, 목사의 직분이다. 목사들은 설교 이외에도 매 주일 어린이들을 위한 신앙교육을 시킬 의무가 있다. 《교회법규》의 규정에 따라 제네바에 있는 세 교회들 (생 피에르, 마들렌, 생 제르배) 에서는 매 주일 정오에 교리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성찬예식과도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교회의 목사들은 이 사역을 성실함과 신중함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둘째,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교사들” (docteurs)이다. 칼뱅에 따르면 교사들의 사명은 “신자에게 건전한 교리를 가르쳐서 복음의 순수성이 무지나 잘못된 견해로 인해 부패되는 것을 막고,” 또한 “하나님의 교리를 보존하며, 목사들과 사역자들의 부족으로 인해 교회가 황폐케 되지 않도록 도움과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이다. 칼뱅에 따르면 정상적인 신학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언어학습과 인문학 수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따라서 교사들은 상기한 예비과정은 물론 도시민의 자녀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한편 칼뱅은 “모든 시민들과 주민들”의 의무에 관해 언급한다. 그들은 자녀들을 주일 정오에 교회로 데려와 신앙교육을 성실하게 받도록 해야 했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은 만 10세가 되면 교리문답의 내용을 잘 학습하여 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문답시험에 통과해야 했고, 교회 앞에서 “신앙교육서에서 제시된 바에 따라 (quil sera exposé au catéchisme) 신앙을 고백한 후에야 비로소”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교회법규》가 공표된 지 얼마 후 칼뱅은 불어로 작성된 제2차《신앙교육서Le Catéchisme de l'Eglise de Geneve》(1542)를 출판하였고 3년 후 동일한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라틴어 서문에서 칼뱅은 신앙교육의 필요성을 또다시 강조한다. 즉 교리문답 교육을 통해 교회를 갱신하고 순수한 교리를 보존하며 그것을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 중요한 목표임을 밝힌다. 칼뱅에 따르면 중세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리문답 교육을 폐지시키고 그 자리에 온갖 외면적인 장식품들로 가득 치장한 소위 “견진성사”를 위치시켰다. 그 결과 중세 교회는 미신적인 신앙과 비성경적인 교황주의를 강화시키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올바른 교리문답 교육은 하나님의 교회를 바른 진리 위에 설립하고 다음 세대의 교회가 또 다시 진리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실천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칼뱅은 제2차《신앙교육서》(1545)의 서문에서 또 다른 중요한 목표를 제시한다. 그것은 “교리의 일치(doctrinae concordiam)”에 기초한 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저는 현재 몰락한 기독교를 위하여 본 교리문답이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교회들은 이와 같은 공식적인 증언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치된 교리를 간직하고 서로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칼뱅의《신앙교육서》는 신앙교육 이상의 중요한 목적, 곧 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리의 일치”를 지향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문병호가 칼뱅의 제1차《신앙교육서》를 가리켜 “이 작품이 교육(docere)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교리(doctrina)의 책”이라고 말하며 “신학 작품”으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킨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시도이다.  요컨대, 칼뱅의 《신앙교육서》는--적어도 그의 저술 목적에 비추어 보았을 때--작게는 지교회의 신앙교육과 성례를 집행하는 데 사용되고, 크게는 복음의 순수성과 개혁된 교회의 유지 및 전수에 필요하며, 가장 넓게는 공교회의 교리적 일치와 연합에 봉사하는 목표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III. 《신앙교육서》의 방법론과 신학적 주제

    주지하다시피 칼뱅의 제1차《신앙교육서》(1537/38)와 제2차《신앙교육서》(1542/45) 사이에는 그 분량과 형식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늘어났고 (약 15,700 단어에서 약 17,600 단어로), 글의 형식에 있어서도 제2차 《신앙교육서》는 목사가 묻고 어린이가 대답하는 373개의 “문답”의 형식을 취하였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신학적인 내용에 있어 양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가르치는 순서” (ordo docendi) 에 있어서--특히 믿음(사도신경) 이후에 율법(십계명)을 배치시킨 변화와 관련하여--칼뱅의 제2차 《신앙교육서》가 루터파의 신앙교육서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제1차《신앙교육서》와 제2차《신앙교육서》의 구조와 내용에서 드러나는 방법론적이며 신학적인 특징을 각각 살펴보기로 한다.
 
1. 제1차 《신앙교육서》(1537) 의 구조와 특징
   제1차 《신앙교육서》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일 년 전 (1536년)에 출판된 《기독교 강요》의 요약문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이다. 두 저작 사이의 유사성은 각 저서의 목차만 서로 비교해보아도 쉽게 드러난다. 


이처럼 두 저작의 목차를 비교할 때, 우리는 공통적으로 부각된 신학적 주제와 그 주제들을 배열하는 대략적인 “가르침의 순서(ordo docendi)”를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칼뱅의 제1차《신앙교육서》(1537)가 가르침의 항목과 순서 그리고 내용에 있어 그의 《기독교 강요》(1536)와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 논의해 보자. 
    필자가 보기에 적어도 두 가지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신앙교육서》와 《기독교 강요》가 다루는 신학적 주제의 범위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교육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의미 있는 답변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성경 전체로부터 이끌어낸 포괄적인 교리적 주제들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핵심 진리의 총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기독교 강요》초판의 서문에서 칼뱅은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규율 (fidei regulam) 대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승리는 우리의 손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539년에 출판된 《기독교 강요》의 서문에서 칼뱅은 그의 저작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부분들을 요약하여 소화한 후 그것을 순서에 따라” 배열함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성경의 주된 가르침을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에서의 나의 목적은 신학생들로 하여금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칼뱅은 1545년의 서문을 통해 《기독교 강요》가 성경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성경은 완벽한 교리를 담고 있어서 더 이상 다른 아무 것도 첨가될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우리의 주님은 성경 안에서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의 보고를 드러내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내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일종의 안내자와 방향을 제시해 주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성경 안에서 그들이 구하는 것을 찾다가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하고, 대신 분명한 길을 찾아 성령께서 그들을 이끌어 가시는 목표에 그들이 확실히 도달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그림설명: 1538년 바젤에서 출판된 칼뱅의 《신앙교육서》이다. 흥미롭게도 서명은 Catechismus sive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신앙교육서 혹은 기독교 신앙 강요)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적어도 칼뱅의 초기 저작들 안에서 발견되는) 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의 개념적인 연속성을 잘 예시해 준다]

상기한 내용은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 (1559) 에서 칼뱅이 명시한 기독교 신앙교육의 목표와 잘 부합한다. 칼뱅에 따르면, 교리교육의 기원은 초대교회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교회 때부터 성실하게 실행되어 왔던 교리교육은 중세의 미신적인 성사들에 의해 단절되었다. 특히 견진성사가 교리교육을 대체한 것에 대해 칼뱅은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이제 개혁된 교회 안에서 모든 어린이들은 교리교육을 통해 “우리 종교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주제들에 대한 핵심”을 학습해야 한다고 칼뱅은 강조한다. 요컨대 칼뱅에게 있어 교리 교육의 출발과 목적은 모두 성경에 있고 특별히 성경 전체의 포괄적인 진리의 체계를 요약적으로 학습시키는 데 있다. 
   둘째, 칼뱅의 제1차《신앙교육서》는--그의 《기독교 강요》초판과 더불어--루터의 《대·소요리 문답 Großer Katechismus & Der kleine katechismus》(1529) 의 형식과 내용에 의해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루터의 《소요리 문답》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세례
천국 열쇠의 직무와 죄의 고백
성만찬 

제2장
가장이 그의 가족들에게 가르쳐야 할 아침과 저녁 기도
 가장이 그의 가족들에게 가르쳐야 할 식사기도와 식후 감사기도

제3장: 의무표
감독, 목사, 전도사의 의무
목사에 대한 신자의 의무
위정자의 의무
백성의 의무
남편의 의무
아내의 의무
부모의 의무
자녀의 의무
종들과 노동자의 의무
주인의 의무
청년들의 의무
과부들의 의무
일반신자의 의무

상기한 목차에서 제1장이 주된 내용에 해당하고 제2장과 제3장은 일종의 부록과 같은 형태로 본문에 첨부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제1장의 구조가 “십계명-사도신경-주기도문-성례”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 것은 칼뱅의 제1차 《신앙교육서》 및 《기독교강요》(1536)의 구조와 동일하다. 또한 루터가 《소요리 문답》의 제2-3장에서 가장, 성직자, 신자, 위정자, 백성, 남편, 아내, 부모, 자녀, 노동자, 주인, 청년 과부 등의 의무에 대해 논한 것 역시 칼뱅이《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장에서 각각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정치적 통치”와 “교회의 목사들과 그들의 권세에 대하여” 논의한 것과 일종의 유비 관계를 이룬다. 물론 가장 주목할 만한 유사성은 “십계명(율법)-사도신경(믿음)”의 배열이다. 이것은 루터와 칼뱅 모두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고, 루터 이래 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칭의의 복음을 신앙교육의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매김 했음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칼뱅은 그의 《신앙교육서》에서 십계명 주해를 마친 후, 율법의 정죄 및 복음적 기능 (그리스도에게로 인도)을 순서에 따라 논의한다. 연이어 이신칭의의 복음을 명시적으로 다룬 후에 사도신경 주해로 옮겨간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어떤 의를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마지 우리의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졌고 또한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마디로 이 의를 가리켜 죄에 대한 사면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종종 행위의 의 (la iustice des oeuvres)와 믿음의 의 (la jutice de la foy)를 서로 비교할 때, 또한 전자가 후자에 의해 파기되었다고 가르칠 때 (롬10장, 빌3장)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이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으며 이 의가 무엇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사도신경 해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 지지해주는 모든 신조들을 순서에 따라 살펴볼 것이다.

이처럼 칼뱅은 칭의의 교리를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잇는 핵심적인 연결고리로 삼는다. 그러나 율법의 정죄 및 복음적 기능과 더불어 칼뱅은 소위 “율법의 제3용법”에 해당하는 내용 역시 강조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칭의론을 논의 후, 칼뱅은 율법이 신자의 삶에서 긍정적으로 역할하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성화되는 것은 율법에 복종하기 위함이다.
......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 힘의 역사가 아니라 영적인 능력(vertu)의 역사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부패로부터 깨끗이 씻음을 입고 또한 의에 대한 순종을 이룰 수 있도록 부드러워진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율법의 사용은 매우 달라졌다. 즉  믿음 없이는 이뤄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속마음에 그의 의에 대한 사랑을 깊이 새겨놓았기 때문에, 외래적인 율법 교리는 (비록 이전에는 오로지 우리의 연약함과 범죄를 고발하는 기능만을 했으나) 이제부터는 우리가 바른 길에서 벗어나방황하지 않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이며, 우리가 모든 온전함으로 세워지도록 격려하는 우리의 지혜이고, 또한 우리가 방탕함에 빠져서 고통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의 규율이다. [시119:105; 신4:6]

상기한 인용문은 칼뱅의 제1차《신앙교육서》에 미친 루터의 영향력을 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평가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돕는다. 즉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되는) 칼뱅의 초기 저작들에서도 율법에 관한 개혁파의 특징적인 활용 (율법의 제3용법)이 눈에 띈다. 물론 루터가 소위 “율법의 제3용법”을 전혀 무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비록 루터파 안에서 “율법의 제3용법”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은 멜랑히톤임에 틀림없지만, 폴 알트하우스(Paul Althaus)가 옳게 지적했듯이, 루터 역시 이에 기본적으로 동의했음에 틀림없다. 요컨대, 이 주제와 관련하여 칼뱅과 루터 사이의 차별성을 지나치게 과장하면 안 될 것이다. 아울러 “율법-믿음”의 순서에 대해서는 루터와 칼뱅 모두 로마서의 배열 순서를 공통적으로 참고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제1차《신앙교육서》와 《기독교 강요》초판 (1536) 사이에서 발견되는 주요한 차이점에 대해 논의해 보자. 이것을 살펴보는 것은 칼뱅이 이해한 《신앙교육서》의 본질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멀러가 옳게 지적한 바대로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수차례에 걸쳐 개정하면서 “이것이 무엇이 되지 말아야만 하는지, 다시 말해, 요리문답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신앙교육서》는 논쟁적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보다 고백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칼뱅은《기독교 강요》(1536)의 여섯 개의 장들 가운데 한 장(제5장)을 따로 할애하여 “가톨릭의 거짓 성례들”을 집중적으로 논박하였다. 이에 앞서 칼뱅은 제4장에서 세례와 성만찬 그리고 “가증함의 극, 가톨릭 미사”에 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을 논박하였다. 칼뱅은 로마 가톨릭의 7성사제도가 얼마나 성경의 진리로부터 일탈해 있는지를 드러내면서 그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과 미사를 가리켜 칼뱅은 “사탄의 한 징표,” “전염병,” “그리스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과 모욕,” “그 분의 십자가를 매장하고 짓누름” 등과 같은 표현들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이에 비해 《신앙교육서》에는 이러한 공격적 언어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 대신 칼뱅은 “그것이 무엇 때문에 제정되었으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주님의 성찬에 관해
성찬의 신비에 부가된 그 약속은 성찬이 제정된 목적과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곧 주님의 몸은 우리를 위해 단번에 주어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이제와 또한 앞으로 영원토록 우리의 소유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한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단번에 쏟으신 주님의 피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성찬” 항목의 서두는 이처럼 신앙고백적이며 신자에게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곧이어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또한 루터파의 공재설 역시 해당됨--을 염두에 둔 진술 속에서조차도《신앙교육서》는 공격적이거나 논쟁적인 표현을 삼간다.

가시적인 기표들 (les signes)은 빵과 포도주이다. 주님은 이것들 안에서 (아래서) 자신의 참된 몸과 피를 제시하시고 우리와 교통하신다. 그러나 이 교제는 영적인 것으로서 그의 성령에 의한 연합이다. 따라서 빵 안에 (아래) 육적인 몸이나 혹은 포도주 안에 육적인 피의 현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사 우리가 여전히 순례자로서 거하고 있는 이 땅을 떠나셨으나, 이러한 장소적 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친히 양육하시는 그의 권능을 결코 파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칼뱅은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단어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앙교육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즉 칼뱅의 《신앙교육서》는--일찍이 폴 펄만(Paul T. Fuhrmann)이 옳게 지적했듯이--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직접적으로 논박하고 그들과 논쟁을 하기보다는 공교회의 바른 교리를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바른 신앙교육을 하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삼는다. 

2. 제2차 《신앙교육서》(1542) 의 구조와 특징
    칼뱅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제네바로 귀환한 후에 곧바로 제2차 《신앙교육서》(1542)를 출판하였다. 이미 앞서 언급한 대로 기존의 내용을 “문답식” (373개의 질문과 대답; 55주 분량으로 구분)으로 바꾸고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의 순서로 배열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이 변화와 관련하여 학자들은 부써 (Bucer)의 영향력을 지적해 왔다. 특히 쟈크 쿠바지에 (Jacques Courvoisier)는 부처의 Kurze schriftliche Erklärung für die Kinder (어린이를 위한 소교육서, 1534)가 칼뱅의 제2차《제네바 교리문답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부써 이외에도 스트라스부르크의 교육자 슈투룸 (Jean Sturm)과 종교개혁자 볼프강 카피토 (Wolfgan Capito)의 영향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칼뱅이 “문답식”의 형식을 취한 것은 전혀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루터의《대/소요리 문답서》는 물론 개혁파 안에서도 이미 문답 형태로 기록된 교리 교육서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피토의 《어린이 신앙교육서》(1524)와 레오 유드 (Leo Jude)의 《신앙교육서》(1534) 모두 문답 형태의 대표적인 《신앙교육서》들이었다. 
 [그림설명: 1545년 스트라스부르크 (Straßburg : Wendelin d.Ä. Rihel)에서 출판된 칼뱅의 제2차 《신앙교육서》라틴어 판본의 표지이다.] 
  
    게다가 제네바로 돌아오기 이전에 칼뱅은 이미 자기가 직접 작성한 문답형식의 짧은《교리문답서》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칼뱅은 흥미롭게도 “사도신경-주기도문-십계명”의 순서를 따랐다. 이것은 칼뱅이 1542년 새로운《신앙교육서》을 마련하기 전에 여러 차례의 실험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전의 《신앙교육서》에 비해 새로운 문답식의 《신앙교육서》(1542)가 갖는 장점은 무엇일까? 크게 보아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할 수 있겠다.
    첫째, 어린이를 위한 학습 효과가 효율성의 측면에서 좀 더 증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을 받는 어린이의 입장에서 볼 때, 동일한 분량의 내용을 암기할 경우 서술형보다는 문답형이 좀 더 이해하기 쉽고 그만큼 기억하기 쉽다. 예를 들어 보자. 다음은 제1차 《신앙교육서》과 제2차 《신앙교육서》의 첫 부분을 비교한 도표이다. 주지하다시피 두 《신앙교육서》모두 “인생의 제 일 된 목적이 하나님을 아는 것” 있음을 밝히는 매우 핵심적인 내용으로 시작한다. 


《신앙교육서》의 첫 번째 장을 비교해 볼 때, 언뜻 보면 새로운 《신앙교육서》의 분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습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어린이의 대답 부분만을 따로 떼어 계산하면 그 분량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사실--불어본을 기준하여 157단어에서 120단어로 감소--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질문자(목사)가 일곱 개의 질문을 순서에 따라 먼저 제시하며 문답을 주도하기 때문에 응답자는 이미 암기한 내용을 질문의 흐름에 따라 좀 더 용이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학습효과의 효율성과는 별도로 내용에서의 변화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율법(십계명)-믿음(사도신경)”의 순서가 “믿음(사도신경)-율법(십계명)”의 순서로 재배열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새로운 《신앙교육서》의 가장 큰 장점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존의 《신앙교육서》에서 보다 일찍 등장한다는 것이다. 제1장의 마지막 문답에서 목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고 어린이는 다음의 세 가지로 대답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 [믿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함 [기도]” 등이다. 이를 통해 칼뱅은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의 순서를 암시적으로 밝혔다. 이제 두 번째 장에서 목사는 이 순서를 어린이에게 주지시킴으로 문답을 시작한다.

[8] 목사: 진실로 그러합니다. 자, 이제 그것들을 순서[믿음-율법-기도]에 따라 배열하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첫 번째 부분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어린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9] 목사: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어린이: 먼저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완전히 선하신 분으로 아는 것입니다.

[10] 목사: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어린이: 아닙니다.

[11] 목사: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린이: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엔 우리가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12] 목사: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어린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또한 그 분께서 우리의 아버지와 구세주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합니다.
    
[13] 목사: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린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한 긍휼을 선포하시고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14] 목사: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를 갖는 것의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요17:3) 에 있다는 말이군요.
   어린이: 그렇습니다.

[15] 목사: 이러한 인식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 무엇입니까?
   어린이: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 신앙고백, 곧 일반적으로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회 안에서 우리가 언제나 소유해온 참 신앙의 요약입니다. 또한 사도들의 순수한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16] 목사: 그것을 암송해 보십시오.
어린이: [사도신경 암송] 

칼뱅은 2장의 주제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의 근거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음을 밝힌다. 이것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과 최고선(영생)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에 있음을 명시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서 《신앙교육서》 전체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곧이어 칼뱅은 이것을 연결고리로 삼아 사도신경에 대한 문답을 시작한다. 이것은 칼뱅이 사도신경의 전체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의 구체적인 요약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새로운 《신앙교육서》는 요리문답의 중심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처음부터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이에 비해 제1차 《신앙교육서》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선언 한 후, 제1차 《신앙교육서》는 그리스도로 곧바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우리의 “무가치함”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먼저 선물해 주셨다고 칼뱅은 말한다. 곧이어 십계명을 각 항목에 따라 설명한 후 칼뱅은 십계명 해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단계”임을 밝힌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우리의 무능함과 부정함을 일깨워 주신 후에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덕과 긍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선하심과 호의를 확증해 보이셨다. 

이처럼 먼저 율법의 길을 통과한 후에 그리스도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는 측면에 있어 제1차 《신앙교육서》는 새로운《신앙교육서》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양자 사이의 차이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 또한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제1차 《신앙교육서》역시 율법을 통해 결국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동일한 목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교리문답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제2차 《신앙교육서》와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율법 안에 계시된 것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신조(Creed)와 더불어 시작한 장본인이 바로 칼뱅이다” (바르트) 라고 외치며 필요이상으로 가르침의 “순서”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엔 두《신앙교육서》의 차이점을 가리켜 “동일한 목적지를 향한 두 개의 다른 길”이라고 규정한 카야얀의 설명이 보다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셋째, 새로운《신앙교육서》는 어린이로 하여금 특히 까다로운 신학적 주제들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용이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먼저 사도신경 첫 부분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어떤 방식으로 학습시키는지 살펴보자.

[19] 목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어떻게 당신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세 분에 대해 암송합니까?
   어린이: 왜냐하면 우리는 세 분을 하나의 신적인 본질 안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버지는 만물의 시작과 만사의 제 일 원인이십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의 영원한 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모든 만물 위에 능력으로 함께 하시지만 동시에 그분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십니다.

[20] 목사: 당신 말은 곧 동일하신 하나님을 이와 같은 세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혀 불합리하지 않으며 (nihil esse absurdi) 그럼에도 하나님은 서로 분리되실 수 없다는 의미이네요.
    어린이: 예 그렇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학습자는 삼위 하나님의 존재와 삼위가 동일 본질이심을 대답한다. 곧이어 질문자(목사)는 학습자의 대답으로부터 삼위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시며 또한 결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론으로 도출한 후 이에 대한 학습자의 동의를 이끌어 낸다. 학습자는 이를 간단하게 긍정함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을 학습한다. 칼뱅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독생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교육한다. 

[19] 목사: 왜 당신은 그[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또한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어린이: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본성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양자됨과 은혜를 따라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자녀삼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우리와 달리 아버지의 본체로부터 나신 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불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엡1:5; 요1:14; 히1:2) 오직 그 분만이 본성적으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20] 목사: 당신 말은 이러한 영예가 오로지 그 [그리스도]분께만 속한 것이고 또한 그분에게만 본성적으로 속한 것인 반면에 우리의 경우는 우리가 그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한 오직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 영예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군요.
    어린이: 예 그렇습니다. 이러한 참여와 관련하여 [성경의] 다른 곳에서 그분은 [그리스도]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나신 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롬8:29; 골1:15)

여기서도 질문자(목사)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우선 목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사실로부터 양자 사이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가에 관한 질문을 먼저 제시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사실을 학습자로 하여금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다. 목사가 제기한 문제점에 대해 학습자는 “본성을 따른 것”과 “양자됨”의 차이를 구분하여 대답해야 한다. 어린이의 대답으로부터 목사는 다시 한 번 “본성을 따른 것”과 “양자로 입양됨”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본성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게 된 것이 오직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됨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음을 학습자에게 주지시킨다. 
    새로운《신앙교육서》의 특징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예정론”에 관한 논의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칼뱅은 1542년《신앙교육서》에서 기존의 《신앙교육서》(1537)에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었던 “예정론”을 삭제했다. 이는 《신앙교육서》에서 다루는 신학적 주제들을 되도록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또한 헤셀링크가 지적했듯이 아마도 어린이가 이해하기 힘든 까다로운 신학적 주제라고 칼뱅이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을 근거로 칼뱅이 예정론에 관한 교육을 아예 포기한 것이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칼뱅은 그의 저서 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e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 1552)의 서문에서 이 책의 주제가 믿음의 기원, 곧 “과연 믿음이 어디로부터 생겨나는지 (unde oriatur fides)”을 설명하는데 있음을 밝혔다. 그것은 자연인으로부터 기원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기원하는 것이다. 요컨대 믿음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거저 베푸시는 선물인 것이다. 만일 (칼뱅의 생각대로) 이것이 예정론 교리의 핵심임을 인정한다면 새로운《신앙교육서》역시 예정론의 본질적인 요소를 누락시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참 믿음과 칭의의 교리를 가르치는 부분에서 칼뱅은 믿음의 기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112] 목사: 그것 [참 믿음 la vraye Foy]을 우리 스스로 소유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어린이: 성경은 오로지 그것이[참 믿음]이 오로지 성령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우리의 경험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칼뱅은 곧이어 참 믿음을 통한 칭의의 은혜를 설명한다. 그리고 칭의의 수단인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임을 학습자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킨다.

[120] 목사: 그렇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하길 원하는군요. 즉 하나님께서 [칭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처럼 그것 [의]을 받는 수단인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이: 예 그렇습니다.

한편 칼뱅은 이미 사도신경의 교회론 부분에서 이러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선택에 의해 존재함을 명시적으로 교육하였다 (문93). 결론적으로, 교리문답의 전반적인 내용을 평가해 볼 때, 비록 새로운 《신앙교육서》가 독립된 항목으로서 예정론을 포함시키지는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예정론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 곧 “선택”과 “믿음의 기원”에 관한 교육을 누락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IV. 칼뱅의 《신앙교육서》의 목회적 유용성: 한국교회로의 적용

   칼뱅이 16세기 제네바 교회를 위해 작성한 《신앙교육서》를 오늘날 한국교회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또한 이러한 시도를 할 때 과연 우리가 중요하게 염두에 두어야할 사항은 무엇일까?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칼뱅은 애초부터 그의《신앙교육서》가 공교회의 보편적인 교리적 합의를 지향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신앙교육서》가 그 내용과 목표에 있어 “16세기 제네바 교회”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에 제한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의 또 다른 저서 《기독교강요》와 더불어 칼뱅의 
《신앙교육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주요한 교리들의 총합을 초심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한 번 요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만일 오늘날 한국교회가 칼뱅의《기독교강요》를--칼뱅의 주장대로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기 위한 교재로서--의미 있게 읽고 있다면, 그의 《신앙교육서》역시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일부가 아닌 전체를 가르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앙교육서》는 그 분량에 있어《기독교강요》보다 매우 짧다. 그럼에도 다루는 주제들에 있어서는 후자만큼이나 포괄적이다. 이것은 신앙교육의 내용이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다양한 교리적 주제들을 매우 폭넓게 포함해야 함을 시사해준다. 다음은 1542/45년 《신앙교육서》의 전체 내용을--애초에 칼뱅이 의도한 바대로--55개주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55주간의 신앙교육을 통해 학습자는 성경에 계시된 다양한 교리적 주제들을 학습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칼뱅 당시의 신학적이며 실천적으로 쟁점이 된 다소 예민한 항목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53주차 교육의 제 355 문항은 성찬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다룬다. 

[355] 목사: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이 빵 속에 갇혀있다거나 그리스도의 피가 잔속에 갇혀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린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성찬의 진리를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높여 하늘을 향하게 해야 합니다.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우리의 구원 [심판주요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썩어질 물질적 요소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주지하다시피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떡과 포도주로 변화된다고 가르쳤다. 루터파의 공재설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가운데 실재적으로 임재--이 때문에 (비유컨대) 수찬자의 마음의 방향이 하늘에서 땅을 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칼뱅은 여기서 ‘화체설’과 ‘공재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각각의 오류를 핵심적으로 논박한다.
    또한 칼뱅은 당시 제네바 교회에서 민감한 사안으로 취급되었던 성찬 참여자들의 자격에 관한 문제 역시 《신앙교육서》의 마지막 부분에 포함시킨다. 우선 질문자(목사)는 성찬을 받기에 부적당한 사람을 배제해야한다는 원칙을 밝힌 후 (368문항), 보다 까다로운 문제, 곧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위선자의 문제를 다룬다.

[370] 목사: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아무리 사악하다 할지라도 [성찬에] 받아주시지 않았나요?
    어린이: 그의 죄악은 아직 감춰져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주님은 알고 계셨지만 그것이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371] 목사: 그래서 위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린이: 목사는 그들을 무가치한 자들로 간주하여 성찬으로부터 제외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사악함을 드러내 주시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372] 목사: 만일 목사 자신이 부적격자를 알고 있거나 [그에 대해] 경고를 [누군가로부터] 받았을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린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충분한 동의와 판단이 없는 한 그들을 [성찬으로부터]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373] 목사: 그래서 반드시 이에 대한 어떤 규칙과 정책이 필요하겠군요.
    어린이: 교회의 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말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상되는 추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공적으로 권위를 위임받은] 감독자들을 선출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성도를 추문에 빠지게 하는 부적격자들을 교회의 권위로써 수찬정지를 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칼뱅은 성찬에 대한 현실적이며 균형 있는 접근을 시도한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예식을 잘 못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거나 교회가 추문에 휩싸이면 안 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반드시 부적격자들을 배제시켜야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칼뱅은 위선자의 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취급한다. 가견교회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들추신 죄들에 대해서만 치리와 권징을 행할 수 있을 뿐이다. 가룟 유다의 죄마저도 그것이 아직 드러나기 전에는--비록 주님께는 이미 드러난 죄이겠지만--그의 수찬참여를 방해하지 않았다. 한편 칼뱅이 수찬 참여의 문제를 《신앙교육서》의 끝에서 상세하게 다른 것은 교리문답의 실천적인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주지하다시피 제네바 교회는 어린이들을 성찬에 참여시키기 전에 교리교육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도 칼뱅은 현실적인 문제에 다소 유연성 있게 대체하였다. 
    이것은 칼뱅의 《신앙교육서》를 우리의 목회 현장으로 접목시킬 때 두 번째로 고려해 볼 사항에 해당한다. 곧 교회는 그것을 현실의 필요에 따라 유연성 있게 적용하라는 것이다. 앞서 도표가 말해주는 대로 칼뱅은 일 년에 걸친 교리문답 교육을 계획하고 또한 실천하였다. 매 주 주일 오후에 이루어지는 교리문답 교육에 참여하는 학습자들은 매 주일 한 두 개의 주제만을 공부했다. 이것은 목사와 피학습자 모두에게 그리 큰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 년 전체의 누적된 학습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성찬을 앞두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어린이들에게는 이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서 칼뱅은 보다 짧고 간단한 유아용 신앙교육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받기 원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문답서”--의 활용을 허락하였다. 로돌프의 연구에 따르면, 칼뱅이 《신앙교육서》를 집필하기 이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짧은 문답용 교재들이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칼뱅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에는 그의 감수를 받은 문답서가 어린이 신앙교육에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로돌프가 소개하는 대표적인 문답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목사: 당신은 누구를 믿습니까?
어린이: 성부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을 믿습니다.

[2] 목사: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한 분 이상으로 존재하는 여러 명의 신들입니까?
어린이: 아닙니다.

[3] 목사: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그의 계명들을 따라야 합니까 아니면 사람의 전통을 따라야합니까?
어린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라 그 분을 섬기고 사람의 계명들을 따르면 안됩니다.

[4] 목사: 하나님의 계명들을 당신은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있습니까?
어린이: 아닙니다

[5] 목사: 그렇다면 당신 안에서 그것을 이루는 분은 누구입니까?
어린이: 성령님입니다.

[6] 목사: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님을 주실 때에는 계명들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가능할까요?
어린이: 그렇지 않습니다.

[7] 목사: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계명들을 온전하게 지키지 않는 모든 자들을 정죄하고 거절하시지 않나요?
어린이: 그것은 사실입니다.

[8] 목사: [그렇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벗어나 구원함을 입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린이: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뜻입니다.

[9] 목사: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지요?
어린이: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켰기 때문입니다.

[10] 목사: 당신은 누구에게 기도하십니까?
어린이: 하나님입니다.

[11] 목사: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어린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는 우리의 변호자이며 중보자이십니다.

[12] 목사: 교회에는 몇 개의 성례가 있습니까?
어린이: 두 개입니다.

[13] 목사: 그것이 무엇이지요?
어린이: 세례와 성찬입니다.

[14] 목사: 세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린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면하신 것과 우리의 영적인 중생 혹은 새로워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15] 목사: 성찬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린이: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전달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은 영생의 소망 가운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16] 목사: 성찬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빵과 포도주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어린이: 그것은 마치 빵과 포도주가 우리의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과 피과 우리의 영혼에 동일한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7] 목사: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빵 안에 그의 피가 포도주 안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까?
어린이: 아닙니다.

[18] 목사: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우리 안에 소유하기 위해 우리는 어디서 그분을 찾아야 할까요?
어린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늘입니다.

[19] 목사: 어떤 수단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린이: 믿음입니다.

[20] 목사: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룩한 성례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참된 믿음을 소유해야하겠지요?
어린이: 그렇습니다.

[21] 목사: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참] 믿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 성령님을 통해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며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해 주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상기한 21개의 문항이 지금까지 논의한 《신앙교육서》373개 문항을 또다시 축약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앙교육서》의 일부가 아닌 전체 내용을 (비록 매우 짧은 문답이지만) 고르게 요약한 것이 인상적이다. 즉 교리문답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들--믿음 (#1-#2), 율법 (#3-#9), 기도 (#10-#11), 그리고 성례 (#12-#21)--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어린이들이 대답하는 부분을 최대한 간략하게 한 것도 학습자의 수준을 세심하게 배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요컨대 칼뱅의 신앙교육은 피교육자의 수준에 따른 눈높이 교육이었음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할 사항은 칼뱅의 신앙교육을 그의 가르침의 사역 전반을 통해 조명해보고 그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매 주일의 요리문답 교육이 역시 매 주마다 이루어진 그의 강해설교와 병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칼뱅은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 강해함을 통해 성경 말씀을 매우 깊이 있게 가르친 교사로 잘 알려져 있다. 일례로 1555년 3월 20일에 시작된 신명기 강해는 이듬해 7월 15일까지 지속되었으며 총 200여 편의 주해 설교를 통해 칼뱅은 신명기 전체를 교인들에게 가르쳤다. 또한 1559년 9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23까지 칼뱅은 창세기를 49편의 설교를 통해 순차적으로 강해했는데 마지막 설교의 본문이 창세기 11장 4절이었다. 이것은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칼뱅이 얼마나 성실하게 가르쳤는지를 잘 예시해 준다.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진행되는 강해설교는 주어진 본문의 의미를 매우 자세하고 깊이 있게 드러내준다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로 하여금 성경 전체의 큰 그림을 보여주기까지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한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진다. 이러한 약점을 잘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교리문답 교육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일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신앙교육을 통해 교인들은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폭넓게 공부할 수 있었다. 요컨대 칼뱅의 신앙교육과 강해설교는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 전체를 그 폭과 깊이에 있어 균형 있게 소화하는 것을 지향한 공동의 프로그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뱅은 그의 《신앙교육서》를 공교육의 현장으로까지 연결 지으려 시도했다. 제네바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은 제네바 교회가 사용하는 신앙고백과 《신앙교육서》에 포함된 모든 교리들을 신종한 것을 서약한 이후에야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을 오늘날 한국의 공교육 현장에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학교교육과 교회교육의 유기적인 관계를 시도하는 기독교 사립학교의 경우는 제네바의 역사적 선례를 참고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V. 결론

    필자는 서두에서 칼뱅의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한 제1차《신앙교육서》(1537/38)와 제2차《신앙교육서》(1542/45)의 역사적 배경, 방법론과 내용상의 특징들, 그리고 그것의 목회적 유용성을 살펴보는 것을 본 논문의 목표로 제시했다. 이 순서에 따라 서론에서 제시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였다. 즉 칼뱅은 성경 전체의 진리 말씀을 요약한 《신앙교육서》를 가지고 교구민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효율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그의 제네바 종교개혁의 핵심 과제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질문과 관련하여 우리는 “칼뱅의 《신앙교육서》를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에 적용할 때 고려해야할 사항은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교회의 신앙교육에 대해 정암 박윤선 목사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궁금해졌다. 신앙교육의 주제를 언급한 정암의 설교와 성경주석을 검토하던 중 다음의 자료를 발견하고 흥미롭게 읽었다. 1983년 5월 1일 정암 박윤선 목사는 누가복음 18장 15-17절을 주해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신앙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또 혹 잘못 생각하기를 아이들은 연구심이 없으니 그 아이들 상대로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아이들 상대로 무슨 진리를 말해보겠는가? 아이들이 복음이 무엇인지 아는가? 내세와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지 아느냐? 깨닫지 못하고 연구도 못하는 그 단순한 아이들인데 그들을 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가지고서 진리 운동에 참가시키고 하나님 말씀 가르치는데 그렇게 전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듯이 소홀히 여기는 일이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깨닫는 데만 관계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연구해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르는 가운데 역사가 많습니다.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은 사실 우리가 모르게 된 겁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르게 되는 겁니다. 이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의 잠재의식 가운데 이 심령 깊이에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도 할 줄 모르고 생각도 할 줄 모르고 젖이나 빠는 그러한 아기들이라도 우리가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린아이들이 잘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아이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이들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많이 말씀했습니다. 신 6:7에 그 말씀이 있고 다른 데도 많이 있는 말씀이죠.

 이처럼 정암은 교회의 신앙교육에 있어 어린이가 결코 예외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성경은 이들을 부지런히 가르칠 것을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잠언 22장 6절 주석에서 정암은 신앙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가르치라”란 말 [&n"j;]은 하나님께 “바침”(dedication)을 의미한다. 신자들이 그 자녀를 가르치는 목적은, 실상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Rolland W. Schloerb). 

  정암에 따르면 신앙교육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신앙교육에 대한 이러한 정암의 정의와 적극적인 태도는 칼뱅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암이 신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내는 것을 목표했다면 칼뱅은 동일한 신앙교육을 통해 제네바 교회의 교구민과 그들의 자녀들을 성경의 사람들로 성장시키는 것을 초기부터 일관성 있게 강조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교회의 신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말씀과 순수한 복음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것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칼뱅과 정암은 일차적으로는 그들 시대의 필요에 대한 반응으로서 신앙교육에 관한 설교와 강해 그리고 저술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교육은 어느 한 특정 시대에 좀 더 필요하고 어느 시대에는 덜 요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그들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칼뱅은 그의 《신앙교육서》가 공교회의 교리적 일치와 연합에 봉사하는 목표를 가진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요컨대 그의 신앙교육이 목표하는 대상은--그의 논리를 포괄적으로 적용할 때--애초부터 지금의 한국 교회와 우리의 자녀들까지 이미 포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