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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교회와 신앙교육

2015.01.21 15:30

SDG 조회 수:3172

취리히 교회와 신앙교육   

박상봉 목사  (합동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들어가는 말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와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신앙생활의 풍경, 삶의 양태, 사회적 구조 등에 있어서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럼에도 그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타락한 인간 의 본질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할 인생들이 있 고, 동시에 그 구원받은 신자들이 깊고 성숙한 믿음생활을 위해 바른 신앙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서 동질성은 여전히 확인된다. 이미 교회의 오랜 전통 속에서 지속되어 온 신앙교육서(Katechismus)에 근거한 교리교육(Katechese)은 특별히 종교개혁 당시 교회 안에서 신앙지식의 전달과 관련하여 가장 유용하게 활용된 신앙교육의 방식이었다. 이 신앙교육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신앙적인 경계와 차이점을 밝혀주는 신앙고백 (Kofession), 신학교, 총회(교회)규범(Kirchenordung), 목회자 부양 등과 함께 종교개혁 을 통해서 세워진 개혁된(reformierte) 교회를 유지·보존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바른 교회는 바른 신학만으로 세대와 세대를 넘어서 지속될 수는 없다. 바른 신학에 근 거하여 바르게 세워진 교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상태를 유지·보존해 갈 수 있는 장 치(수단)들을 필요로 한다. 즉, 바른 교회는 바른 신학에 대한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신앙고백, 바른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교회와 목회자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총회규범, 모든 신자들을 깨우고 일치시킬 수 있는 신앙교육, 근심 없이 목회에 전념할 수 있는 목회자의 기본 생활의 안정 등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여서 세대와 세대를 넘어서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 초기에서부터 신앙고백, 목회자 신학교육, 총회규범, 평신도 신앙교육, 목회자 부양 등에 대한 관심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단 순히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새롭게 세워진 개혁된 교회만 생각한 것이 아니 라, 더 근본적으로는 그 개혁된 교회가 어떻게 다시 타락하지 않고 장구한 역사 속에서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숙고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500년 동안 개혁 된 교회가 유지되어 온 것은 단순한 우연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성 경이 표명하는 믿음과 행위에 관한 신앙교육(교리교육)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산물이 아 니라,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신앙문제임을 인식해야 해야 한다.1    본 논고는 종교개혁 당시 취리히 교회의 신앙교육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앞서 종교개 혁으로부터 새롭게 공론화된 교리교육의 의미와 신앙교육서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핵심 적으로 살피면서, 특별히 이 시대에 개혁주의(Reformiertentum)를 확산시키기 위해서 제네바 교회의 장 칼뱅(Jean Calvin)과 협력하며 전(全)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하인리 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의 목회사역 동안에 이루어진 취리히 교회의 신앙교육을 조명하고자 한다. 물론, 취리히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와 그의 동역자 레오 유트(Leo Jud)의 신앙교육에 대한 관심을 선행적으로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 취리히 교회의 신앙교육은 쯔빙글리 이래로 연속성을 가지고 전개되었기 때문 이다. 취리히 종교개혁자들이 바른 신학 위에서 바른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세대와 세대를 넘어서 유지보존하기 위해서 신앙교육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인식시키면 서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숙고와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러한 이해 속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취리히 종교개혁자들도 신앙교육 과 관련하여 내용적으로 ‘무엇이(was)’ 방법적으로 ‘어떻게(wie)’ 전달되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성령의 사역 옆에서 기독교 교리가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식에 따라서 가르쳐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즉, 신앙교육을 교리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날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학적인 고려 속에서 주목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기도 한데, 취리히 교회의 신앙교육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I. 종교개혁 시대의 한 문학적인 장르(Genre)로서 ‘신앙교육서’  
1. 교회분열 속에서 신앙교육의 중요성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교권의 남용 속에서 확립한 비(非)성경적고 미신적인 구원과 교회 의 계급화된 체계2는 루터, 쯔빙글리, 칼뱅 등을 통하여 실제적인 교회개혁운동을 불러일 으켰다. 이 종교개혁은 복음적으로 개혁된 교회와 신학의 실현으로써 교회 안에서 행해 지는 예전과 직제의 변화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동시에 거짓된 신앙내용을 극복하기 위 한 사도적이고 교부적인 가르침에 근거한 신앙고백의 변화도 결과시켰다. 개혁의 선구자 들은 종교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성경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뜻을 굽히지 않고 교회-교리사적인 맥락 아래서 검증된 바른 신학에 근거한 신앙고백의 확증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투쟁 은 각 사람의 경건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심성(Mentalitaet)을 창조했는데, 이로부터 개인 의 의식과 윤리, 교회의 신앙생활 그리고 사회 전반의 외적인 구조변혁을 불러일으켰다: 신학과 교회에 대한 새로운 규정과 함께 신앙을 가진 시민들이 한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 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이상적인 모범이 숙고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관심은 종교개혁 이래로 개혁된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 사이의 신학적인 차이점을 선명히 드러내야만 하는 현실적인 필요와 맞물려 있었다.3 종교개혁 의 사상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 카톨릭 교회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층의 지지뿐만 아 니라, 종교개혁이 시작된 시점부터 작동되고 있었던 ‘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4 아래서 각 개인의 종교적인 자유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결정에 따라서 새로운 신앙을 갖 게 된 평범한 사람들의 합리적인 설득을 위해서도 요청되는 과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글 을 읽거나 쓸 줄 몰랐지만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정당성과 신앙적인 유익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동요와 불안이 없는 개혁된 신앙고백의 수용과 신앙적인 충성도가 요구되었기 때 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관련된 논쟁적인 주제의 토 론, 성경 주석, 종교개혁 신학사상의 기본적인 설명,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공적인 신 앙고백, 성인들과 어린이(청소년)들의 신앙지식의 습득을 위한 신앙교육 등과 관련된 저 술들을 기술하는데 많은 관심을 집중했다.  특별히, 이러한 저술들의 강력한 확산은 종교개혁의 주요한 진술에 근거한 신학적인 동질성과 일치를 폭넓게 확대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5 이 현상은 종교개혁 도시들 안 에서 새로운 변화의 공론화에 대한 중요한 장을 마련해 주었다. 개신교와 교황주의 교회 사이의 신학적인 경계선이 어떻게 그어져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보편자각을 사람들로 하여금 선명히 갖도록 한 것이다.6 하지만 이때 동시적으로 기억되야 할 것은, 종교개혁 사상을 담고 있는 저술들은 당시의 현실과 관련하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다수의 배움이 없는 신자들에게는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들에게 신앙의 교파적인 정체성을 갖도록 해주는 교리가 설교로 선포되지 않았거나 신앙교육을 통해서 설명되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유럽 전역에서 확보되는데 큰 어려 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새롭게 개혁된 교회가 동일한 신앙정신을 가지고 유지되거나 보존되는 것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래로 개 신교가 설교에만 관심을 쏟고, 만약 신앙교육에는 무관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신앙 교육이 없었거나 불규칙적이며 목적이 분명치 않고 체계 없는 신앙교육이 이루어졌다면, 종교적인 개종이나 신앙의 확신을 위한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끼친 신앙적인 영향 력은 매우 미미했을 것이다.7 오늘의 교회 현상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개신교 자체를 새롭게 개혁한 길로부터 다시 과거의 종교적인 오류로 회귀하게 하는 위험으로 급속히 몰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교회분열과 함께 새롭게 개종된 신자들에게 형성되어야 할 신앙고 백의 전환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신앙교육은 종교개혁 시대 의 매우 주목되어야 할 특징이었다. 신앙교육의 교리적인 내용은 교회 안에서 예배 때 낭독되었으며, 각 주제들은 작은 부분으로 나뉘어져 규칙적이며 개별적으로 설교되거나 해설되기도 했다.8 이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종교개혁 도시들에서 중세말의 유산이 라고 할 수 있는 가장의 의무로써 책임지워진 가정 신앙교육9뿐만 아니라, 또한 신앙교 육서가 직접적으로 수업자료로 활용되었던 학교 안에서 신앙교육이 수행되었다.10 이 신앙교육은 ‘참된 교리’(vera doctrina)를 왜곡, 위조 그리고 남용으로부터 경계하고 보호하 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동시대의 사람들과 다음 세대에게 전파하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11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유산은 한편으로 신학적인 자료들을 통해서 계승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와 함께 더 효과적으로는 신앙교육을 통해서 계승되 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때문에 존 머레이가 이렇게 언급 한바 있다: “ 교리문 답 의 교육 체계가 유지된 곳에서 종교개혁 의 최적 의 열매들이 보존되고 전수되었다 . ”12   

2. 교리와 경건에 관한 가르침의 도구로서 신앙교육서(Katechismus)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교육을 살피면서, 우리의 생각이 단순히 그 시대의 역사적인 사 건만을 살피는데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시대가 어떠했는가를 보면서, 무엇보다도 그 시대를 살았던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 앞에 놓인 신앙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으며, 또한 어떤 대안(산출물)을 제시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개신교로의 분리적인 전환 속에서 새로게 표명 된 신앙내용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된 신앙지식을 어 떻게 완전히 새롭게 극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개혁된 신앙의 내용을 어떻게 전달 할 것인가, 또한 이 신앙정신 위에서 새롭게 세워진 개혁된 교회를 어떻게 유지발전시 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시대적인 물음들 앞에서 한 대안으로써 신앙교육에 지대한 관 심을 가졌던 것이다.13 그리고 이에 대한 가시적인 실효성을 끌어내기 위해 종교개혁자 들은 실천적으로 신앙교육서를 작성하는데도 큰 열심을 기울였다. 즉, ‘규범이 되는 규범 (norma normans)’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성경의 체계적 진술인 신앙과 행위 에 관한 ‘규범화된 규범(norma normata)’으로서 상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교 리)에 대한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서 다양한 형식을 가진 신앙교육서가 출판된 것이다.   그리고 신앙교육서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발생한 개혁된 신앙원리를 담아내는 중요한 문학적인 장르(Genre)로 발전되었다. 이 결과는 신자들 – 종교적인 지식이 없는 신자들 의 가르침을 위한 소위 ‘신앙교육서-문예부흥’(Katechismus-Renaissance)을 발생시켰 는데, 기독교 신앙교육과 신앙교육서에 관한 역사 중에서 최고점에 이르는 시대에 도달 하도록 하였다.14 신앙교육을 위한 중요한 교육자료였던 신앙교육서는 바른 신앙지식을 간결한 서술을 통하여 신자들의 의식 안에 깊이 고정시키는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그것 은 유럽 전역에서 오직 학문적인 배움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라틴어 옆에서 국민(자국) 언어를 교회의 영역 안에서 역동성 있게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신앙교육서는 각 나라에 서 많은 종교개혁의 저술들이 라틴어에서 자국어로 쓰여지도록 전환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15 이 뿐만 아니라, 신앙교육서는 매우 광범위 하게 보급된 종교 적인 출판물로써 공적이거나 사적인 영역 안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신앙매체였 다. 한 실례로, 불링거가 1540년에 출판한《기독교 가정》에서 밝힌 내용을 상기할 필요 가 있을 것이다: “ 확실히 도처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교육서 들 , 즉 독일어로 출판된 믿음 안에 있는 어린 이 들의 교리 교육서 들을 가지고 있 는데 , 어느 누구도 무지에 대해서 한탄 하지 못할 정도로 신적인 일 들의 인식 을 위해 단지 조금만 애쓰면 되었다 . ”16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이 다양한 신앙교육서들을 쓴 이래로 ‘신앙교육서(Katechismus)’ 는 종교개혁 시대에 종교적인 영역 안에서 매우 익숙한 일상용어가 되었다. 이미 16세기 중반에 개신교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그 숫자를 모두 헤 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출판되었다.17 어린이, 청소년, 초신자 성인의 신앙교육을 위해 서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내용으로 작성되어 유럽의 모든 교회 안에서 활용된 기독교 신 앙문서였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종교개혁 시대에 신앙고백(서)과 분리될 수 없는 신앙 교육서들은 다양한 제목들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어로는 Katechismus(신앙교육서), Enchiridion(교본), Lehrtafel(교육목록), Bricht(보고), Summa(요해), Fragstueck(질문), Unterweisung(가르침), Erklaerung(해설) 등으로, 그리고 라틴어로는 Catechesis(교리해 설), Catechismus(신앙교육서), Compendium(요해), Doctrina(규범), Examen(시험), Elementa(기초), Explanatio(해설), Institutio(가르침) 등으로 불리어졌다.18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교육서는 의뢰자 혹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저마다의 고유한 신 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범위에 있어서 한정적이긴 했지만, 내용적인 구성 에 있어서도 ‘사도신조,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성례’의 해설로 작성된 전통적인 면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도신경의 순서에 근거한 구속사적인 체계를 따르는 형식을 취하는 면도 있었으며 혹은 저자의 고유한 입장을 따르는 면도 있었는데, 하지만 어떤 형식을 추구하든 신앙교육서는 신학적이고 교육적인 관심사로써 성경 진리의 효과적인 전달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저자의 의도 속에서 신앙교육에 가장 적합한 내용과 형식 이 취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신앙교육서들에는 합의된 순서에 따라서 신학적인 주제들이 동일하게 기술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신학적인 주제들이 구성되었다. 여러 저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신앙교육서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지라 도,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한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신앙교육서들은 교리를 주제별로 설명하거나, 혹은 문답식으로 가르치는 형식을 띠고 있 다. 신앙교육대상의 연령이나 신앙교육목적과 관련하여 고려된 면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하게 된다. 이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신앙교육서를 작성할 때 교육 대상자의 연령과 지 적인 수용능력에 따른 교육효과를 기대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유럽의 종교개혁 지역들 안에서 개신교 교리가 신자들에게 보편적 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교리교육의 학습교재로서 신앙교육서들의 보급과도 큰 연관성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이 교회 안에서 설교되고, 학교에서 가르쳐지며 그리 고 가정에서 읽혀진 것이 신자들에게 성경적인 신앙지식을 갖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추구한 각 지역들 안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적인 색채를 완전히 벗은 개혁된 교회가 안정적으로 정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종 교개혁 시대에 신앙교육서는 단순히 신앙지식의 전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개 혁된 교회와 신앙정신을 유지·보존하는데 있어서 결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기독교 신 앙유산이었던 것이다.   

3.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교육 방식   
종교개혁자들은 신앙교육과 관련하여 교육을 받는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내용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즉, 청중들의 수용능력(Fassungsvermoegen)에 맞게 내용이 가르쳐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19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 시대는 방법론적으로 우리 시대보다 시대적인 현실이나 학문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신앙교육적인 면에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즉, 종교개혁 당시는 오늘날과 비교할 때 교육환경에 있어서 많은 열악함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실례로, 성경이 사제들 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라는 신앙의식의 성장과 그의 실천으로써 성경 이 모국어로 번역된 점들과 관련하여 평신도들 역시도 자유롭게 성경을 소유하고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모든 가정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은, 이전의 중세 에 비하여 15세기 요한 구텐베르그(Johann Gutenberg)에 의해서 혁명적인 인쇄기술이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동안 높은 가격 때문에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전체 인구의 절반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서도 성경이 보급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성경이 사제들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을 직접 찾고 확인하는 기회 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 당시에 신앙교육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인쇄된 신앙교육서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당연하다.21 가난하거나 글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신앙교육 서 자체가 사치스러운 물품이나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교회 안에서 신앙교 육은, 부유하고 글을 아는 일부의 신자들이 성경과 신앙교육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교리 설교나 해설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에는 많은 제약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신앙교육을 받는 신자들 중에서 몇 명 정도가 설교나 해설을 메 모할 수 있는 종이를 매시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가르치는 자의 설명을 듣고, 동시에 질문에 대한 배우는 자의 답변을 확인 것 이외에, 오늘날처럼 답변자가 성경을 소유하고 읽는 자로서 본문을 확인하며 신앙교육서의 (문답)내용을 직접 확인하는 식의 능동적인 참여는 단순하지 않은 문제였다. 이러한 성경과 신앙교육서를 지참하고 이루어진 신앙교 육은 당시에 부유한 가정이나 학교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종교개혁자들은 신앙교육의 극대화된 효과를 위해서 각 교회의 실정에 맞는 신앙교육서의 작성과 신앙교육의 방식을 숙고할 수 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16세기 종 교개혁 당시 최상의 신앙교육은 규칙적인 시간 속에서 각 연령대의 구성원들에게 신앙교 육서가 해설되거나 그 내용이 문답적인 방식으로 확인되는 것과 관련이 깊었다.    

II. 취리히 교회와 신앙교육   
1. 울리히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루터가 1529년에 저술한 《 대·소요리문답 》 같은 신앙교육서를 남기지는 못했다. 물론, 이 사실은 쯔빙 글리가 어린 세대의 신앙교육과 그것의 실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결코 의미 하지는 않는다. 그는 루터보다 훨씬 앞서 청소년들의 신앙적인 양육에 관심을 가 진 것으로 간주되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저술을 집필하고자 하는 계획도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 기 때문이다. 쯔빙글리가 1523년 8월 1 일에 라틴어로 저술한 《존귀한 청소년 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에 관한 울리히 쯔빙글리의 권면》22이 선명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23 이 청소년 신앙교육 서가 쯔빙글리의 신앙교육에 대한 이해 를 대변해 주는 유일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교육사상은 몇몇 저술들에서 매우 짧게 언급한 것들 이외 에 오직 여기에서만 전체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사상에 근거 한 쯔빙글리의 신앙교육에 관한 철학과 목적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쯔 빙글리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개혁된 교회가 지향하는 성경적 복음과 그 복음에 근거한 신앙을 가진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과 이웃에 대해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 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이해시켜주고 있다. 쯔빙글리의 청소년 신앙교육서는 1523년 1월 29일 첫번째 취리히 논쟁(Erste Zuercher Disputation) 이후로 본격화된 취리히 종교개혁의 과정24 속에서 그로스뮌스터 교회 부속학교(Schule am Grossmuensterstift)의 개혁의 일환과 연계되어 출판된 것이 다. 이 학교 개혁과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취리히 의회 는 이 신앙교육서가 출판되고 두 달이 채되지 않는 1523년 9월 29일에 학교 개혁을 단 행하였다.26 많은 학생들이 목회자로 길러지는 것과 관련하여 종교개혁 사상에 근거한 교육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것과 기독교 시민으로서 깊은 신앙지식과 윤리적 소양을 갖 도록 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다.27 무엇보다도, 이러한 교육적인 관심 속에서 1525년 6월 19일에는 취리히 부속학교의 상급과정으로써 개혁주의 교회의 목회자를 위한 최초의 교 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회(Prophezei)’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고전 14:26-29에 대한 이해 속에서 실재화된 예언회는 취리히 종교개혁의 과정 속에서 쯔빙글리가 종교개 혁을 받아들이지 않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이나 재세례파로 명칭되는 급진주의자 들보다도 주님의 교회와 취리히 시민들을 위해서 개혁된 목사와 설교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명한 목회자 교육기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는 히브리어, 헬 라어 그리고 라틴어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과 성경의 바른 해석에 정통한 설교자들을 길 러내는 것이 의도되었다.28 그리고 1532년에 고등교육기관(Hohe Schule)으로써 모든 과 정이 통합되어 체계적으로 구성되고 – 1833년에 설립된 취리히 대학교(Zuerich Universitaet)의 모태가 된 – 《Schola Tigurina》로 재편된 그로스뮌스터 교회 부속학 교는 취리히 종교개혁을 지속시키고, 그 종교개혁의 사상을 보급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 단으로써 개혁된 교회를 섬겨야 할 장래의 목사들을 훈련할 장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존귀한 청소년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에 관한 울리히 쯔 빙글리의 권면》이 쯔빙글리의 의붓 아들인 게롤트 마이어 폰 크노나우(Gerold Meyer 
                                           월 29일에 개혁주의 교회 설립을 위한 첫 역사적 회합으로 간주될 수 있는 첫번째 취리히 논쟁(Erste Zuercher Disputation)이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쯔빙글리는 이전까지 선포했던 복음적 설교의 내용을 핵심적 으로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67개 신학적 논제들을 제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가를 분명 히 했다. 7월에는 이 67개 신학적 논제들을 해설한 저술이 출판되었다(원제목: Vßlegung vnd gruend der schlußreden oder Artickel durch Huldrychen Zuingli Zuerich vff den xix. … tag Jenners jm M.D.xxiij. jar Vßgangen … Zuerich, Christoph Froschauer, 1523). 쯔빙글리는 첫번째 취리히 논쟁이 끝나고 20일 정도가 지난 2월 19일에 쭉(Zug)에 있는 자신의 친구인 베르너 스타인너(Werner Steiner)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해 설을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Zwingli, Auslegung und Begruendung der Thesen oder Artikel, 6). 1523년 10월 26일에는 성상과 미사 문제를 다룬 두 번째 취리히 논쟁이 열렸다. 긴 논쟁에도 불구하고 취리히 의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신자들을 의식하여 성상과 미사를 즉각 폐기하라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취리히 종교개혁자로 하여금 먼저 설교와 글을 통해서 시민들을 계몽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고 20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츠빙글리는 설교와 함께 1523년 11월 17일 에 《짧은 기독교 입문서》를 출판하여 시민들을 설득시켰다(원제목: Ein kurtze und christenliche inleitung, die ein ersamer rat der statt Zürich den seelsorgern und predicanten in iren stetten, landen und gebieten wonhafft zuogesant haben, … Ußgangen uff den 17. tag novembris 1523). 1524년 1월 20일에 마지막 취리 히 논쟁이 이루어졌다. 츠빙글리는 교황주의자들의 우상숭배를 비판하면서, 이 우상숭배가 교회와 사제들의 오류와 부패의 뿌리임을 지적했다. 이와 관련하여 쯔빙글리는 이 논쟁 동안에 행한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설 교한 내용을 정리하여 1524년 3월에 《목자》라는 저술을 출판했다(원제목: Wie man die waren christlichen hirten und widrumb die valschen erkennen, ouch wie man sich mit inen halten sölle, durch Huldrychen Zuingli beschriben im 1524. Jar).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쯔빙글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을 위한 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25 Gut, Zwingli als Erzieher, 304. 쯔빙글리는 1523년 6월에 그로스뮌스터 교회 부속학교의 개혁과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였는데, 그것은 3개월 후(1523년 9월 29일)에 의회를 통해서 수용되었다: 《Vortrag zur Reformation des Stifts, 1523》과 《Gutachten zur Reformation des Stifts, 1523》 (Huldreich Zwinglis sämtliche Werke, vol. 2 (Leipzig: Heinsius, 1908) (Corpus Reformatorum 89)).   26 Schola Tigurina, h.g. von Hans Baechtold u.a. (Zuerich und Freiburg: Pano Verlag, 1999), 18.  27 Gut, Zwingli als Erzieher, 304.  28 Zwinglis Erziehungsbuch, 223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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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n Knonau)29에게 헌정된 것이지만,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 에는 의심이 없다. 쯔빙글리는 자신의 의붓 아들을 포함하여 당시 모든 청소년들로 하 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모범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 하여 이 신앙교육서를 출판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30 물론, 이 저 술은 실용서로 폭넓게 활용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존귀한 청소년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에 관한 울리히 쯔빙글리의 권면》은 서문을 제외하고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 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하여, 자기 자신 을 훈련하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삶의 책임 에 관하여. 이 신앙교육서에는 종교와 교육 에 대한 강조를 넘어서 종교개혁 사상에 토 대를 둔 기독교적인 삶 전체에 대한 진술이 담겨져있다. 인문주의 색채를 지니고 있으 면서도, 그 중심에 깊은 성경적인 가치가 녹 아있는 토대 위에서 종교개혁의 신앙과 경건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하여’에서 쯔빙글리는 우리 안에서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신앙은 외적인 말씀 자체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인 역사를 통해서 발생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성령 은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제공하시며,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의를 통 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죄, 죄책감,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 원해 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값진 존재로 만들어 준다.31 쯔빙글리는 성령, 복음 그 리고 믿음에 대한 인식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어떻게 전가되 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 리를 어떠한 삶으로(생의 태도로) 이끄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이 해 속에서 쯔빙글리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 복음을 아주 정확 하고 성실하게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 젊은 이들은 올바르게 배워서 , 가능한 한 온전하고 또 가능한 한 하나님을 닮는 삶을 사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야 한다 . ”
다음으로,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 것에 관하여’에서 쯔빙글리는 바른 삶을 위해서 바른 가르침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언어적 인 준비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히브리어,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 하지만 쯔빙글리는 헬 라어와 라틴어를 익힘에 있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데, 영혼과 경건을 해칠 수 있는 많은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쯔빙글리는 언어 능력의 중요성을 이렇 게 언급하고 있다: “ 이러한 무기와 함께 우리는 겸손함과 지식에 대한 희구 속에서 , 인간 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고 , 게다가 그 인간의 지혜로 정당하게 평가될 수도 없는 , 천상 의 지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 ”33 그리고 쯔빙글리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신중할 것 을 조언한다. 언어의 내용뿐만 아니라, 언어의 습관에 대해서 주의를 시킨 것이다. 또한, 쯔빙글리는 절제에 대해서도 당부한다. 술, 음식, 의복 등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답게 행동 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연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젊은 때 사랑에 빠지는 것을 당연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여성에 대해 순결함을 잃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그 밖에 쯔빙글리는 이교도 작가들의 글들, 음악과 수학, 전투훈 련 등과 관련하여서도 어떻게 감당하는 것이 좋은가도 권면한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쯔 빙글리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자들은 무역을 주도하고 스스로 자급자족 했던 고대 도시 마실리아(Massilia)에서 살았던 사람들처럼 성실해야 한다는 것도 피력 하였다.34   끝으로, ‘삶의 책임에 관하여’에서 쯔빙글리는 기독교적인 삶에 대해서 강조한다. 기독 교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청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의, 성 실, 정절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덕성들을 지녔을 때 그리스도의 공동체, 즉 국가와 시민을 바르게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36 그렇다고 해도 쯔빙글리는 젊은 때의 즐거움을 빼앗지는 않는다. 적당한 오락과 다른 사람들과의 건전하고 절제 있 는 교제를 권장하고 있다. 그리고 쯔빙글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부모존경,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 등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도 조언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쯔빙글리는 젊은 날에 관심가져야 할 용무들로 신체를 단련하는 것, 친절함, 말과 행동 의 진실함 등에 대해서도 충고하기를 잊지 않는다. 이러한 쯔빙글리의 권면은 단순히 건 전한 삶을 표명한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규범으로 받는 삶을 표명한 것이다. 이 때문에 쯔빙글리가 그리스도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 그 리스도인은 단순히 믿음에 대해서만 거창하게 말하는 자들 이 아니라 ,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항상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리고 위대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다 . ”   
쯔빙글리의 신앙교육서는 종교개혁 이래로 개혁된 교회에 맞게 사람을 양육하여 새로 운 신앙과 진리 지식에 따라서 살도록 하는데 한 지침을 주는 기독교 저술이다. 교리적인 지침을 가르치는 것 보다는, 오히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준비하는) 성장기의 청소 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며 그리고 참된 경건의 삶을 위해서 마음과 신체적으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쯔 빙글리는 청소년 시기에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다. 하지만 이 지식은 그냥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학문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환기시킨다. 이러한 준비가 필 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속에서 이웃과 시대를 섬기기 위함이다. 이렇게 볼 때, 쯔빙글리의 《존귀한 청소년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에 관한 울리 히 쯔빙글리의 권면》은 체계적인 교리지식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청소년들이 어떤 신 앙정신과 경건으로 무장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선명한 지침을 주는 안내서와 같다고 하겠 다.    

2. 레오 유트   
쯔빙글리의 사망 이후 취리히에서는 공 적으로 어린 세대의 신앙교육을 위한 새 로운 길이 열렸다. 1532년 10월 6일에 공 포된 설교자와 총회에 관한 규정 (Praedikanten- und Synodalordnung) 에 서 취리히 의회는 어린 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에 관한 입장을 표명했다. 38 특별히, 신앙교육서에 관한 수업(Katechismus- unterricht)의 틀 안에서 어린이를 위한 설교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사도신경, 기도, 십계명 그리고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담긴 신앙교육서를 규칙적으 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취리히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신앙교육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1525년에 레오 유트에 의해서 ‘벽보신앙교육서 (Wandkatechismus)’가 작성되기는 했지 만, 이것은 교리적인 설명이 없는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마리아 찬가를 하나의 큰 종이 위에 인쇄해 놓은 것으로 신앙교육적인 면에서 거의 실용성이 없었다.39 이와 관련하여, 1533년 취리히 총회는 다 음 해 모임 때까지 신앙교육서를 집필할 것을 유트에게 위임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트는 1534년과 1539년 사이에 교회, 학교 그리고 가정에서 사용된 세 권의 공적인 레오 유트의 초상화 신앙교육서들을 작성하였다.40 그리고 유트에 의해서 오늘날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 학년을 위한 신앙교육서 역시도 작성되었는데, 아마도 종교개혁 당시 개혁주의 교회에서 거의 유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유트가 저술한 신앙교육서들의 특징을 핵심적으 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a. 《대요리문답》41   
유트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서 《대요리문답》 을 작성했는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신학적인 주 제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십계 명 해설(20문답) –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사도신 경 해설(66문답) – 성도들의 기도에 관하여: 주기도 문 해설(5문답) – 성만찬에 관하여(9문답). 100문답 으로 구성된 유트의 《대요리문답》은 취리히 교회 의 신앙교육을 위해 출판된 최초의 공적인 문서자 료이다. 1533년 취리히 총회에서 유트에게 위임된 임무로, 그는 1534년에 이 신앙교육서를 작성하였 다. 서문를 쓴 불링거는 이 신앙교육서가 단순히 (오늘날 12세 이상의 나이인) 청소년들(Jugend)을 위해서만 쓰여진 것이 아니라, 동시에 부모를 위해 서도 쓰여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42 각 가정에서 부모들은 이 신앙교육서를 가지고 자신의 자녀들에 게 신앙교육을 해야 했다. 하지만 유트의 《대요리 문답》은 더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유트는 다음 해에 《대요리문답》 보다 내용은 축약되고, 그 대신에 문답은 더 세분화된 형식의 《소 요리문답》을 1535년에 작성하였다.      

b. 《소요리문답》43  
유트의 《소요리문답》는 《대요리문답》과 동일한 구조 속에서 제목을 달리하여 다음 과 같은 신학적인 주제들로 작성되었다: 하나님과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65문답) – 믿음에 관하여(96문답) – 하나님의 어린이들의 기도에 관하여(35문답) – 거룩 한 성례에 관하여(16문답). 이 《소요리문답》 서문에서 유트는 이전의 《대요리문답》유트의 대요리문답 (1534) 
 
을 통한 신앙교육의 수업이 (오늘날의 유초등부 정도되 는) 어린이들(Junge Kinder)에게는 어려웠다고 밝히고 있 다. 이 때문에 《소요리문답》을 새롭게 작성했다고 기술 하고 있다.44 이 신앙교육서는 총 212문답으로 구성되었 는데 《대요리문답》 보다는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내용 이 정리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당시 교회교육의 현실 속 에서 나타난 문제점에 대해 인지하고, 그에 따른 즉각적 인 반응으로 발생된 것이다. 이 《소요리문답》은 개혁주 의 교회 안에서 다른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쓰어진 신앙 교육서들과 함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ndelberger Katechismus)’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45    

c. 《짧은 신앙 문답집》46   
유트는 자신이 앞서 작성했던 신앙교육서와 다른 구조 속에서 《짧은 신앙 문답집》을 저술하였다. 이 신앙교육서는 10가지 신학적인 주제로 구성되 어 있다: 참된 종교에 관하여 – 인간의 인식과 죽 음에 관하여 – 죄에 관하여 – 그리스도와 믿음에 관하여 – 회개와 거듭남에 관하여 – 사도신조에 관 하여 – 기도에 관하여 – 성례에 관하여 – 교회의 사역자들에 관하여 – 관원들에 관하여. 《짧은 신 앙 문답집》은 앞서 소개된 유트의 독일어로 쓰어 진 다른 신앙교육서들과 달리 라틴어로 쓰어진 것 이다. 이 신앙교육서는 1539년에 출판되어 라틴어 학교 학생들을 위해 쓰여졌는데, 실제로 학교 밖에 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 신앙교육서의 많은 부분이 칼뱅이 1537년에 출판한 제네바 신앙교육 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유트가 칼뱅의 신앙교 육서의 내용을 가져올 때 예정론이나 권징 같은 주 제를 의도적으로 삽입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주제들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아직 학생들이 배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 고 유트는 성만찬 역시도 취리히에서 칼뱅의 입장이 가르쳐지면 혼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가르쳐지고 있었던 자신의 소요리문답에 있는 쯔빙글리의 입장에 근거한 내 용을 기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트의 소요리문답 (1538) 
유트의 짧은 신앙 문답집 (1539) 

d. 《아주 작은 어린이들을 위한 문답들》48   
매우 단편적으로 작성된 《아주 작은 어린들을 위한 문답들》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 님에 대하여(1 문답) –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 하여(5문답) – 십계명에 대하여(15문답) – 믿음에 대하 여(14문답) – 기도에 대하여(3문답) – 주기도문을 위한 질문들(14문답) – 세례에 대하여(2문답) – 주님의 성만 찬에 대하여(2문답). 이 신앙교육서의 정확한 기록년대 는 확인되지 않지만, 예상되기는 아마도 1535년 《소 요리문답》과 함께 출판되었거나 혹은 그 직후로 얼마 되지 않아서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49 이 소요리문답 은 《대요리문답》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오늘 날 유초등부 아이들을 위해서 다시 저술된 것인데, 즉 유트는 이러한 현실적 이해 속에서 유초등부보다도 더 어린 유치부 아이들을 위해서 《아주 작은 어린들을 위 한 문답들》을 저술한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 신앙교육서는 교회 현실 속에서 드러난 어린 아이들의 지식습득 능력과 관련하여 발생된 문제에 대해서 직시 하고 반응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레오 유트는 개혁주의 영역 안에서 신앙교육서를 가장 먼저 집필한 인물 에 속한다. 그의 신앙교육서들은 종교개혁 당시 취리히 교회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체계 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각 연령대를 고려하여 신앙교육서를 작성하게 한 것은 취리히 교회가 가장 효과적인 신앙교육 방식을 숙고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렇 게 연령대를 고려한 집필방식은 유트의 교육철학이 반영된 결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단순히 성경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누군가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도 록 시도된 것이다.50 신앙교육의 효율성을 위해서 취리히 교회가 얼마나 많는 노력을 했 는가를 알게 해 준다. 이러한 면에서 그 이후로 쓰여진 모든 개혁주의 신앙교육서들은 유트에게 선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3. 하인리히 불링거   
하인리히 불링거는 종교적인 혼란이 가장 극심했던 1550년대에 취리히에서 신앙교재
                                           zwischen 1530 und 1600, Bd. I/3,1b, Hildesheim·New York 1976, 704.  48 독일어 제목: Dies sind Fragen fuer die ganz kleinen Kinder. (Hg. von Robert Ritter-Zweifel, Katechismen von Leo Jud, 355-369.) 필자는 이 신앙교육서의 1535년 초판을 아직까지 직접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49 《아주 작은 어린이들을 위한 문답들》은 독립적으로 출판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신앙교육서는 1538년 에 출판된 《소요리문답》의 맨 뒤에 부록으로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Der kuertzer Catechismus. … … Getrucht zu Zuerych by Christoffel froschouer / im Jar … M.D.XXXVIII.)    50 반 다이켄, 잃어버린 기독교의 보물 교리문답 교육, 64p.  
1538년에 인쇄된 《소요리문답》 안에 첨부되어 있는 유트의 아주 작은 어 린이들을 위한 문답들로 활용된 두 권의 신앙교육서를 집필하 였다51:   
▪ 기독교 신앙의 요해(1556)52   ▪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1559)53  
불링거의 신앙교육서들은 내용적인 면 에서 우리의 시각을 특별히 그의 신학적 인 발전과 관련하여 1550년대 후기 신학 의 이해로 이끈다. 이 두 저술은 불링거 의 신학적 체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다른 대표적인 글들인 《신학 주제에 관 한 50편 설교》54와 《스위스 제2 신조》 사이에 놓인 신학적 입장을 매우 잘 드러 내 주고 있다. 불링거의 후기 신학적인 발전을 이해할 때, 우리는 1549-51년에 쓰여진 《신학 주제에 관한 50편 설교》 를 곧바로 1566년에 출판된 《스위스 제 2 신조》와 연결해서 살필 수 없고, 반드 시 1550년대에 쓰여진 이 신앙교육서들을 통해서 첫번째 저술의 신학적인 입장이 어떻 게 나중 저술의 신학적인 이해로 발전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불링거의 신앙교육서들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학적인 내용은 교리사적으로 《스위스 제2 신조》 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개혁주의 교회의 초기 정통주의 신학사상의 길을 예비하는 한 완 성된 전체신학(Gesamttheologie)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두 권의 신앙교육서 외에 불링거는 다른 두 권의 신앙교육서를 더 집필하였다: 《헝가리 교회들과 목 사들에게 쓴 서신》과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보고서》. 이것들은 취리히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고 헝가 리와 독일 바이어른 지역에서 고난받고 있는 절박한 개신교도들의 신앙고백적인 교육을 위해 쓰여진 것들이 다. 이 저술들 안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반대하는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특징들이 매우 강하게 표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짧고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두 신앙교육서의 원본제목은 다음과 같다:   헝가리 교회들과 목사들에게 쓴 서신(1551)의 라틴어 원본제목: Brevis ac pia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ad dispersos in Hungaria Ecclesiarum Christi Ministros … Ovarini M.D.LIX.  박해받는 사람들의 답변을 위한 보고서(1559)의 독일어 원본제복: Bericht, Wie die / ſo von waegen vnser Herren Jeſu Chriſti vn ſines heiligen Euangeliums / ires glaubens erſůcht / vnnd mit allerley fragen verſůcht werdend / antworten vnd ſich halten moegind: beſchribē durch Heinrychē Bullingern. 1559. 
 
2) 두 권의 신앙교육서   
이 신앙교육서들을 집필하면서 불링거의 절대적인 관심은, 당시 종교개혁 이후의 세대 (Volksschichte nach der Reformation)를 위한 신앙교육은 믿음과 삶(Glaube und Leben) 이 신앙지식과 경건(Glaubenwissen und Froemmigkeit)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55 어떻게 하면 어린 세대의 정신과 마음 속에 종교개혁의 사상을 견고 하게 잡리잡게 하여 개혁된 교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를 염두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불링거의 신앙교육서들은 선명한 기독교 진리의 인식을 위해 취리히 학교(Schola Tigurina)에서 수업교재로도 활용된 것들이다. 여기에는 어린이 들, 학생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교회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반드시 학습해야 하 는 성경적인 교리가 체계적이며 요약적으로 담겨져 있다.   
a. 기독교 신앙의 요해(1556)         
1550년대 중반은 신학적, 교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갈등들이 심화되는 시기였다. 독일 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루터주의 교회만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개혁주의 교회와 다 른 종파들은 허락되지 않은 1555년 9월 29 일에 체결된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평화협정 (Augusburger Religionsfrieden) 이후에, 특 별히 개혁주의 교회와 루터주의 교회 사이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대표적으로 칼뱅과 요아힘 베스트팔(Joachim Westphal)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성만찬 논쟁과 불링거와 요한 브렌츠(Johannes Brenz) 사이에 벌어진 기독 론 논쟁으로 드러났다.56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함께 개신교 두 영역인 개혁주의 교회와 루터주의 교회의 신앙고백 화과정(Kenfessionalisierung)도 더욱 심화되 었는데, 결국 각자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신앙 정신, 삶의 형식, 인격적 특성, 문화적 이해 등을 지니고 서로가 연합될 수 있는 길은 모 두 차단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영국과 이 탈리아 북부로부터 온 종교난민들로 취리히 시가 북적거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럽 곳 곳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박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1556년에 불링거는 두 권의 저술을 출판하였다: 한 권은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고통 받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불링거가 1554년부터 1556년까지 매주 화요일에 행했던 100편의 요한 계시록 강해설교들을 모아서 출판한 것이다:《100편의 요한 계시록 설교》.57 이 설교집은 핍박 아래 있는 신자들을 종말론적인 위로와 굳건한 믿음과 함께 천상의 소망을 가지고 인내 하도록 하기 위한 불링거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권은, 지금 우리가 다 루고 있는, 당시 신학적인 논쟁들로 힘들어 하는 신자들을 위해서 목회적인 의무감을 가 지고 출판한 《기독교 신앙의 요해》이다. 신자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계속되는 신학적인 논쟁들로 인하여 많은 갈등과 혼란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 사상에 근거하 여 단순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쉽고 선명한 교리를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신앙교육서가 요청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불링거는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기독교 신앙의 요해》 를 저술한 것이다.  이 《기독교 신앙의 요해》는 1556년 2월에 독일어로 쓰여진 초판이 나온 이래로 1608년까지 총 31판이 인쇄되었다. 라틴어, 프랑스어, 화란어 그리고 영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서 읽혀졌다. 흥미로운 점은 1556년과 1565년 사이에 제네바에서 13판이나 인쇄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칼뱅 사후에서 취리히와 제네바 사이에 깊은 신앙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신앙교육서는 중요한 ‘신앙교육자료’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대중적인 ‘신앙서적’이었다. 지식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고 모두가 쉽게 읽 을 수 있는 형식으로 쓰여진 불링거의 대표적인 저술들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58  불링거의 《기독교 신앙의 요해》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헤센(Hessen) 의 선제후 빌헬름 6세(Wilhelm VI.)에게 바치는 헌사, 당시 여러 시사적인 문제들을 담 고 있는 서론, 10가지 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본론, 요한계시록 14:6-7로 끝맺고 있 는 결론. 특별히, 서론에서 불링거는 매우 빈번했던 신학적인 논쟁들과 관련해서 당시 신자들의 불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신학적인 논쟁들로 신앙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 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요해》를 저술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불링거는 개신교 신자들의 신앙일치, 성경의 바른 가르침,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짓 가르침에 대 한 경계 등을 목적으로 이 신앙교육서를 집필했음을 확인시켜 준다.59 그리고 이 저술의 본문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성경에 근거를 둔 개혁주의 신학을 선명히 이해할 수 있도 록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링거 신학의 한 특징인 ‘언약론’이 두드 러지게 표명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요해》의 본문은 총 10가지 신학적인 대 주제 아래 101가지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내용들은 수 많은 성경의 증거구절들 로 채워져 있다: i. 성경, ii.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적 사역, iii. 죄와 그 죄에 대한 조치, iv. 하나님의 율법, v.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 vi. 믿음, vii. 기도, viii. 성례, ix. 신자의 선행, x. 종말.        
불링거는 취리히 교회를 섬기면서 취리히와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 고 있는 교회의 사건들에 대해서 주목했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했던 불링거는 당시 신자들의 신앙적인 갈등과 혼란에 예 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러한 실천적인 반응으로 불링거는 신자들에게 종교개혁으로부터 표명된 신앙지식을 쉽고도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요해》를 저술한 것이다. 학문적인 성격보다는 신자들을 바른 진리로 섬기기 위한 목회적인 관심 속에서 저술했는데, 특별히 배움이 있는 사람과 배움이 없는 사람 사이에 어떤 심리적인 장벽도 없이 모두가 성경적인 교훈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의도 속에서 시도된 것이다. 청소년들, 청년들 그리고 배움이 없는 성인들이 큰 어려움 없이 기독교 신앙지식에 도달 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 성경 진리를 통해서 불링거는 모두가 신앙과 삶의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했다.60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의 요해》는 모든 신자들이 일상 의 언어로 쉽게 읽을 수 있는 기독교 대중서적이었으며, 동시에 성경적인 믿음과 그 성 경에 근거한 삶을 자세하면서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신앙교육서였다. 불링거는 지식 -사변적인(intellektualistisch-spekulativ) 서술이 아니라 성경해설적인 서술로 각 교리 적인 내용들을 성경의 본문과 잘 조화시켜서 모든 독자들이 동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다.61 이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요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신앙서적으로 교 회와 가정에서 읽혀졌을 뿐만 아니라,62 취리히 학교에서는 청소년 신앙교육을 위한 교 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구원의 지식과 함께 개혁주의적인 공동체의 윤리와 양심을 교 육하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무엇보다도 그 사회의 인권적이고, 공적인 유익을 위한 발전 에 기여할 수 있는 인격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신앙자료로 활용되었다.63 불링거는 《기 독교 신앙의 요해》를 통해서 성경 진리와 삶이 분리되지 않는 인간의 성숙을 전 삶의 영역 속에서 이룰 수 있기를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b.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1559)   
불링거는 교회의 신앙교육뿐만 아니라 학교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취리히 학교를 위해 서 많은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학교규범, 학교시설, 장학제도 등을 개선하 고 학생들이 좋은 조건 가운데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불링거의 학교에 대한 관 심은 단순히 이러한 외적인 것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관 심을 가졌는데, 특별히 그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교재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 이와 관련 하여, 불링거는 취리히 총회의 요구 속에서 1559년에 취리히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사용될 라틴어 신앙교육서인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를 저술하였 다. 복음적인 진리의 근거와 확신을 주기 위해서 취리히 학교의 신앙교육 교재로 활용된 것이다. 불링거의 신앙교육서는 그 당시까지 취리히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앞서 소개된, 유트가 저술한 신앙교육서들을 대체하기 위한 목 적도 지닌다.  불링거의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는 학생 들에게 매우 유용하고 핵심적으로 교리적인 내용 을 제공했는데, 목회자가 되기 위해 취리히 학교 의 상급과정(Lektorium)에 입학할 때 많은 도움 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신앙교육서 는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되어서 가정과 각 개인의 신앙영역 속에서 기독교 교리의 이해를 위한 소책 자로 읽혀지기도 하였다. 불링거의 신앙교육서는 1559년 처음 라틴어로 출판된 이후로 1599년까지 라틴어와 독일어로 다섯 번 더 출판되었다. 여 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 역시 다른 신앙교육서들과 함께 하 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 때 중요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65   불링거의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헌사가 담긴 서문과 7개의 큰 신학적인 주제들 안에서 294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진 본문. 이 신앙교육서는 전통적인 신앙교육서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불링거의 개 인적 의도에 따라서 정리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종교개혁 사상에 근거한 기독교 진리를 설명하면서도 언약론 같은 특정한 주제를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링거는 각 질문들에 대해서 답변할 때 성경해설적인 방식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하였다. 일곱 가지 신학적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i. 거룩한 성경, ii. 살아계 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iii. 하나님의 언약, iv. 율법과 십계명, v. 믿음과 사도신경, vi. 기도 와 주기도문, vii. 성례. 불링거는 종교개혁의 지속성과 관련하여 청소년들과 일반 신자들의 신앙성장을 위한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기독교 진리를 쉽게 이해하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도 큰 기여를 하는 신앙교육서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칼뱅의 “신자들에게 지식 없이는 믿음도 없다”는 이해를 전적으로 동의했던 불링거는 믿음을 위한 지식적인 ‘무엇(was)’을 ‘어떻게(wie)’가 고려된 신앙교육서를 통해서 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각 주제들을 배열하고, 그 교리적인 내용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제목과 설명 혹은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된 형식은 신앙지식에 대한 인간의 효과적인 인식과 관련하여 종교개혁 시대의 깊은 숙고가 내재되어 있는 교육방식의 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신앙 교육의 기초자료로써 신앙교육서는 교회와 학교 안에서 신앙교육을 위한 필수 교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가정에서 자녀의 신앙교육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신앙서적이기도 했다. 불링거에게서 신앙교육서는 교회, 학교 그리고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교육의 연계 를 가능하게 하는 구심점으로 이해되었다.67 이러한 분명한 지침에 근거하여 어디에서나 동일한 신앙정신이 가르쳐지도록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불링거는 신앙교육서의 중요성을 늘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더욱이 직접적으로 《성인을 위한 신앙교육서》를 쓰기도 한 것이다.   특별히, 종교개혁 당시에 신앙교육은 기독교 국가(Respublica Christiana)에서 성숙한 신자를 길러내는 것과 의식 있는 시민을 길러내는데도 큰 역할을 감당했다. 설교를 바르 게 이해하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읽지 않도록 하며 그리고 체계화된 신앙지식을 갖게 하 여서 사고, 경건(윤리) 그리고 시민적인 삶을 위한 선명한 지표를 제공했다. 한 국가를 이루고 있는 시민들이 서로 다른 신앙고백을 추구함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분열을 신앙교육을 통해서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68 전쟁을 발생시킬 정도로 심각했던 종교개 혁 당시 교회의 분열과 교파적인 갈등은 그 시대를 살았던 종교개혁자들에게 짐지워진 큰 과제였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사역하는 지역 내에서는 가능하면 신앙적인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시민적인 화합과 성숙을 위해 서도 신앙교육의 자료인 신앙교육서는 당연히 그 사회의 필수적인 도구였다. 이러한 의 미에서 불링거의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는 취리히 교회가 지향한 신앙교육의 목 적들 중에 하나인 기독교 국가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활용된 신앙교재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2) 신앙교육의 목적과 방식   
불링거가 교회, 학교 그리고 가정의 신앙교육을 통해서 의도한 것은 믿음과 삶이 분리 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믿음과 삶은 깊이 있는 신앙지식(신학)과 경건 과도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69 불링거에게 신앙교육은 모든 세대와 관 련이 있었다. 먼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교회, 학교 그리고 가정의 신앙교육을 통해 서 경건한 삶의 변화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했고, 다음으로 성인들은 교회의 분열 이래 로 새로운 믿음의 질문들에 대해서 바른 성경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 와 관련하여 불링거의 강조점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 경건의 삶을 강 화시키고 그리고 신앙공동체적인 삶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에 있었다. 모든 연령층을 위 한 신앙교육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교회 프로그램으로 간 주된 것이다. 불링거의 신앙교육 내용은 모든 시대에 요청되는 신앙지식과 삶의 성숙을 이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구속사적인 교리와 신앙적인 윤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불링거는 신앙지식의 내용에 있어서 어른과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과 문제들을 세 분화하여 전달하기를 원했다. 실례로, 십계명을 가르칠 때 성인들의 관심과 청소년들의 관심 사이를 구분하였다: 제5계명의 부모공경은 성인들과 관련하여 국가에 대한 이해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면, 청소년들과 관련하여서는 부모 자체에 대한 이해에 더 많은 설명을 첨가하였다. 그리고 제7계명의 간음금지는 성인들과 관련하여 부부관계에 관심 을 두었다면, 청소년들과 관련하여서는 그 나이 때에 있을 수 있는 성적인 방종에 시각 을 돌렸다.71 즉, 불링거에 의하면 목회적인 사역에 속하는 신앙교육은 성숙한 신앙생활 과 일상의 건전한 삶을 위한 신앙지식의 효과적인 전달이 전제된 전략적인 계획임을 나타낸다. 이 때문에 신앙지식의 전달은 다양한 현실 안에 있는 여러 연령대에 맞게 내용 적이고 방법적으로 고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신앙지식의 수준에 따른 고려도 간 과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a. 연령에 따른 고려   
우리는 불링거의 《기독교 가정》 안에서 어린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서 어떻게 신앙교 육이 이루어지길 원했는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어린이가 진지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시작 나이에 대해 일부사람들은 5 살로 규정하 였고 , 다른 일부사람들은 반대로 7 살로 규정하였다 . 그럼에도 아이들은 모두가 동일한 이해능력을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에 , 그에 따라서 일부 에게는 집중적으로 가르쳐져야 하며 , 다른 일부에게는 어려운 것 없이 천천히 가르쳐져야 한다 . 이와 관련하여 부모가 신앙교육을 규정된 나이에 근거하여 시도하기 보다는 , 오히려 잘 살펴서 확인된 이해의 상태에 따라 서 시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 부모들이 떠맡아야 할 신앙교육은 한 유일 한 목적에 도달해야 하는데 , 즉 아이들은 정당하고 , 신앙적이고 , 경건하고 그리고 성실한 하나님의 종들 과 정직한 사람들로 길어져야 한다 . 그 때문에 어린이들은 하나님께 경건 한 자들의 공동체적인 기도와 함께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 그들에게 하 나님의 계명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지금까지는 언어로만 고백하고 또 실수없이 낭독하는 것에 대해서만 배웠던 믿음의 조항들 ( 사도신경 ) 이 가르쳐져야 한다 . 왜 그들이 ( 유아 ) 세 례를 받았으며 , 세례가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의 만찬 안에서 ( 과 함께 ) 무엇이 가르쳐지 고 강조되어야 하는 가를 알도록 해야 한다 . 이러한 신 앙교육과 함께 어린이들에게 이 주 제들의 내용들이 분명하게 각인되도록 , 그들이 12 세 나이가 될 때까지 혹은 그 이상까지 가르쳐야 한다 . 까다롭고 특별한 질문들이나 이해하기 힘든 주제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지는 것은 좋지 않고 , 오히려 명료하고 단순한 진리와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신앙지 식이 가르쳐지는 것이 좋다 . 하지만 가르치는 자는 어린이들에게 많는 것을 요구 할 수 없고 , 지나 친 부담감을 주어서도 안되며 , 또한 가르친 내용들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 다 . … … 어린 아이 들이 학습의 엄격함과 불만족 을 통하여 질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 ”

b. 신앙지식의 수준에 따른 고려   
불링거는 《신학 주제에 대한 50편 설교》에서 신앙지식의 상태에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도 실제적으로 제시하였다:  
“ 교사는 초신자들에게 참된 믿음의 주제들을 가르친 다 . 그 수업은 첫 믿음의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 언약의 내용들 , 십계명 , 사도신경 , 주기도문과 성례 . … … 그럼으로 앞선 성도들을 위한 신앙교육수업은 성경의 해석 뿐만 아니라 , 또한 모든 기독교 주제들의 선 명하고 가능한 대로 풍성한 해설 로 이루어진다 :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와 회 개 그리고 , 이어서 적절하게 , 위법한 자의 엄한 질책이나 혹은 진지하고 현명한 책망이 가르쳐질 것이다 . … 여기에 는 기독교 오류들에 대한 반박 , 이단들 에 대한 지식 그리고 바른 신앙지식의 보존 역시 포함되어 있 다 .”73       
이러한 신앙교육의 내용적이고 방법적인 고려를 통하여, 불링거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따른 신앙공동체 안에서 세대와 세대 사이의 신앙의 연속성에 대해서 생각했을 뿐만 아 니라, 또한 학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차별을 예방하길 원했다. 그리고 신앙교육 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의 공교회적인 특징에 근거한 교회와 교회 그리고 신자와 신 자 사이의 신앙적인 일체성도 확보하길 원했다: 특별히, 새롭게 개종한 신자들이나 초신 자들이 있을 경우에 신앙교육은 빠른 시간 내에 기존 신자들과 신앙일치를 갖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 교회의 신자들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확정시켜주고, 동시에 다양한 생각을 가진 신자들을 한 신앙정신으로 묶는 역할도 한 것이다.  
c. 신앙교육에 대한 취리히 교회의 풍경    
취리히에서는 전통적으로 시의회가 인정한 신앙교육서가 1년 혹은 2-3년의 주기로 매 주일 교회에서 해설되고 가정에서도 사용되었다: 당시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매 주 일 예배에 보내야 했다.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은 교회의 교사로부터 믿음의 내용(신앙교                육서 해설)을 배웠다. 주일 저녁에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질 문했다. 이 뿐만 아니라, 부모들은 주중에도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서의 내용들을 교육시 켜야 했다.75 하지만 매일 신앙교육이 가정에서 이루지지는 않은 것 같다. 불링거는 부모 가 매일 신앙교육을 해야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종종 하는 것이 좋다는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각 가정에서는 부모가 많은 것을 설명하기 보다는 예배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신앙교육서의 내용을 조금씩 암기하는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라틴어 학교와 독일어 학교에서 학생들은 매주 토요일과 주일 오후 3시에 신앙 교육서 해설을 청강했으며, 또한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수업 시간에 신앙교육서를 공부했다. 종교개혁 당시 취리히에서 신앙교육이 아무런 계획이나 고려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어린이와 청소년(초신자)은 자신의 연령 대와 신앙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교회, 가정 그리고 학교에서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III. 취리히 교회의 신앙교육이 말하는 실천적 의미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신앙교육과 관련하여, 취리히 신앙교육서들은 기독교 교리 가 신앙학습자들을 위해서 내용적이고 방법적으로 어떻게 설명(서술)되어야 하는가를 가 르쳐주는 한 좋은 모범을 제시해 준다: 특별히, 우리가 불링거의 신앙교육서들을 읽는다 고 할 때, 그것들은 집중적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목회자들을 향해서 한 교회가 세 대와 세대를 넘어 전수되어야 할 신앙교육을 위해 어떤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숙고를 하게 한다. 우리에게 개혁주의 교회가 이 땅 위에서 바르게 세워지고 지속되기 위해서 각 연령층의 신자들에게 무엇이 가르쳐지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물 음의 오늘 시대적인 답변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이, 신앙교육의 목적은 기독교 신앙의 인식과 교리적인 무지에 대한 극복에 있다. 종교개혁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오랜 기독교 전 통 안에 있는 것으로, 이 용무는 과거나 현재나 교회가 이 땅 위에 항상 존재하고 바르 게 보존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은 불변하지만, 그럼에도 변화되는 시대적인 사조나 흐름과 관련하여서 성경 진리가 필요한 대상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한다. 종 교개혁 시대에는 신앙교육서를 가르치는 목사(교사)가 한 신앙교육서를 가지고 각 연령 대에 맞게 설명하는 방식이든, 혹은 각 연령대에 맞은 신앙교육서를 작성하여 신앙교육 을 수행하는 방식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신앙지식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데 있었다 는 사실이다.   사실, 종교개혁 시대나 우리 시대나 신앙정신의 동일성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없지만, 그럼에도 시대정신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신앙지식을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 달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 당시 보다는 훨씬 더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의 필요와 실 천이 요구된다: 절대가치가 인정된 종교개혁 시대에서 성경 진리는 다른 부가적인 설명 이 없이도 아이들에게 상대적인 가치로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성주의에 근거한 지식발전과 사회 전반의 다양성의 문제는 자칫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성경 진리 역 시도 다양한 것들 중에 하나로 전달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에게 신앙 지식을 바르게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그 내용이 그들의 전 삶과 가치를 아우를 수 있어 야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내용에 따라서 삶의 원리와 체계로까지 규정될 수 있도록 하는 접근이 필요한다.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시대 이후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유럽 교회에 안에서 신앙교육 이 실패하고 있는 절대적인 한 원인은 성경 진리가 상대적인 가치로 성도들에게 전달되 고 있다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국가로서 교회, 가정 그리고 학교에서 어떤 식으로든 신앙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에 별다른 제약이나 심리적인 거부감은 없지만, 그러 나 이성우위와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성경 진리 역시도 여러 지식들의 한 내용으로만 가 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서구 교회의 (숫자적인) 몰락은 이미 예견되어 왔던 것이다. 물론, 한국의 현실도 결코 다르지 않다. 이미 한국도 다원화된 사회로 급속하게 변모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현대의 학교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그 전제 아래서 모 든 것을 학습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 사회의 황금만능주의는 인간의 가치와 존재성을 논하기 앞서 인간의 기능적인 능력만을 우선시하고 있다. 현재 아이들은 기계적으로 자 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모든 시간을 쏟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현실 속 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신앙의 원리와 삶의 절대가치로 전달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교회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속에서 신앙교 육을 시행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과 여러 신앙적인 도전들에 대한 시대적인 파고를 넘기 위해서 성경적인 가르침을 위한 신 앙교육서 집필과 신앙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개혁주의 신앙정신을 표방하는 교회에서 20년 동안 교리문답을 가르친 한 목 사의 외침이 인상 깊다: “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으로 받은 가장 위대한 유산이 성경의 진리임을 안다면 , 우리는 교사 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우리 아이들 을 교리문답으로 교육하는 일에 마땅히 헌신해야만 한다 .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믿음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
우리는 자칫 모든 것을 성령께만 의존하고 오직 시대탓만 하면서 우리 스스로 감당해 야 할 수고와 책임을 소홀히 할 수 있다. 우리가 가르쳐야 할 개혁주의 신앙내용인 ‘무 엇(was)’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wie)’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수고와 연결되어 있 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교육적인 수고에 대한 열매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거 룩한 성령의 조명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그 열매는 우리의 바른 교수법, 열정적 헌신 그리고 바른 교육을 위한 숙고와도 분리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이것들에 의무지어 있다는 사실 역시도 인정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성경 진리를 가르치는 사역자가 중생과 믿음의 성장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설교나 신앙교육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창출해 낼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도구로서 자신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만이 유일한 책임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어린 신자들의 신앙성숙을 위해서 교회 를 통한 신앙교육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나 교회를 통한 신앙교육은 전(全)신앙교육의 한 부분일 뿐이지 중심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신 앙교육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당연히, 교회와 가정의 조화와 협력 속에 서 이루어져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처럼 교회, 가정 그리고 학교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현실과 다원화되고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 인생의 최고 가치가 하나님께만 있음을 설득력 있게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시대보다는 휠씬 더 깊이 있게 교회와 가정의 연계를 강화시켜야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신앙교육에 대한 더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대안을 가 져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제와 함께 믿는 자들의 수가 많아질 수 있도록 하는 선교적 책임 역시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급조되지 않고 잘 준비된 예배, 설교, 찬 양, 기도 등과 함께 신앙교육을 위한 교재개발(신앙교육서)과 전달방식 연구, 교육대상에 대한 더 깊은 관심, 전도에 대한 당위성, 신앙적인 안목으로 시대를 볼 수 있는 세계관 등은 우리에 짐지워진 몫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실천적으로, 전통적인 설교식 해설이나 문답적인 교육방식 옆에서 성경과 신앙교육서를 읽고 확인케 하는 능동적인 참여의 확대 뿐만 아니라, 동시에 특별히 – 아이들이 매일 수학, 영어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듯이 – 성경 진리를 제시하는 신앙교육서 역시 스스로 학습될 수 있도록 하는 동기, 선명한 내 용, 참여의 즐거움, 영적이고 현실적인 유익 등의 섬세한 고려를 통하여 자발적인 수행 까지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신앙교육의 극대화를 위해서 우리가 표명하는 신 앙정신에 근거한 지속적인 연구와 물질적인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교육의 문제는 개교회만의 고민이 아니라 전체 교 회에 속한 과제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신앙교육과 관련하여 오늘날 한국 교회가 내세울 게 무엇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예배형식, 설교내용, 신앙교육서 등과 같은 신앙교육의 체계를 이루는 기초적인 요소들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 야 한다.  

나오는 말   

종교개혁 당시 취리히 교회는 체계적인 신앙교육을 통해서 모든 종교적인 혼란을 극복 하고 바른 교회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시대를 책임있게 감당하였다. 오늘날 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의 여파에 따른 현실적인 위기가 늘 상존하고 있지만, 어찌되었 든 취리히 교회는 종교개혁 이래로 지금까지 500년의 역사를 지속시켜 왔다는 사실이 상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그냥 허락되는 것일까?  한국 교회는 지금 시대적인 변화에 준비를 해야 할 시기이다. 먼저, 한국 사회는 전통 사회에서 전통, 근대 그리고 탈현대가 공존하는 다변화된 사회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는 종교다원주의와 New Age 종교의 영향 속에서 전통 종교(기독 교)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며 사람들을 종교성은 있으나 신앙의 정체성이나 소속이 없는 현실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기독교, 명상적 동양종교 그리고 샤머니즘을 혼합시키며 자신 스스로의 신앙을 구축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으며, 새 로운 종교들에 대한 수용과 생활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국 교회는 사회적으로 많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른 신학적인 이 해가 전혀 없는 부흥일변도 행태, 인생의 참된 의미와 깊이를 알려주지 못하는 기복신앙, 신앙정신에 근거한 의식적인 삶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신비주의, 보편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윤리적 문제, 신앙의 객관성 상실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단시비와 이단들의 발흥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교회의 깊이 없는 신앙지식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신자들은 현실 속에서 느끼는 실존적인 갈등을 개인화거나 내면화시 켜서 스스로 비관하다가 교회를 오해하고 믿음까지 저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삶의 의 미있는 답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교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이다. 한 국 교회가 진정한 구원의 가치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주지 못하고 성장성공 위주의 ‘성공신학’이나 끊임없는 행사를 통해 신자들의 감성과 열심을 자극하는 ‘활력목 회’에 휩싸여서 진리보다는 기법을, 깊이 있는 복음의 해석 보다는 방법론을, 질보다는 양을 추구하며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서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세속화된 종교의 옹호 자로 그 길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찾는 젊은 세대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 고 있거나 급속한 저출산 문제까지 맞물려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부정적 인 현상이 더욱 가시화된다면 한국 교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특별히, 이러한 시대적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잃어 버린 신앙교육을 가정과 교회 안에서 회복시켜야 한다. 복음의 간결성은 매우 소중하다. 하지만 그 간결성이 복음의 심오함을 결코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77 깊이 있는 신앙교육를 통해서 모든 세대에게 설교가 감당하지 못하는 복음의 심오함을 알도록 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구속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신앙교육을 통해서 한국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무질서한 가정, 세속적인 삶, 불경건한 쾌락의 추구 등이 사라지도 록 해야 한다. 성경 진리에 대한 무지와 오류를 기초로 세워지는 사단의 왕국이 더 이상 가정과 교회 안에 침범할 수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78 하나님의 나라가 신앙과 삶의 모든 영역 안에 굳건히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옳지 않고 거짓 된 것에 침묵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지 않는 것들을 향해 진실을 말하게 하고 마음을 동(動)하여 저항하게 한다. 오늘 시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해 저항하며 바르고 깊이 있는 신앙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길이 있음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소명을 위해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의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것처럼, 오늘 시대의 교회 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 다”(호 4:6)라는 외침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한국 교회의 500년 역사를 계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