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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 교회와 신앙교육

2015.01.21 15:27

SDG 조회 수:3217

팔츠(하이델베르크)교회와 신앙교육




이남규(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들어가며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던 첫 번째 여성이었던 안나 마리아 반 슈르만(Anna Maria van Schurman, 1607-1687)이 4살 때 들판에서 꽃을 꺾고 있을 때, 그 집의 가정부가 그녀에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1문답을 암송하도록 했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며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습니다”라고 암송했을 때, 그녀에게는 큰 기쁨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으며, 그녀의 이 경험과 감정은 평생 그녀에게 머물렀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세상에 나온 지 450년이 지났다. 당시에는 팔츠(Pfalz)라는 한 지역만을 위한 요리문답서였으나 다른 많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많은 이들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통해서 같은 믿음 안에서 같은 감정과 경험을 갖는다. 
450년 전에 팔츠교회는 이 큰 영향력을 가진 요리문답서를 왜 만들게 되었을까? 팔츠교회는 처음에 어떤 방식으로 이 요리문답서를 교육하려고 했을까? 아직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본 논문은 팔츠교회가 요리문답서를 만든 필요성과 목적, 그들이 처음에 의도했던 교육방식을 고찰하고, 이 요리문답서가 확산되어 현재의 모습이 어떤지 간략하게 살펴보고, 우리가 배울 점을 제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우리는 먼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세상에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과 작성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그 다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필요성과 목적을 당시 팔츠의 경건한 통치자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목소리를 통해서 살펴본다. 계속해서 팔츠 교회법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당시에 어떻게 가르쳐지도록 규정했는지, 팔츠교회법의 다양한 예식서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내용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고찰한다. 그 다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어떻게 확산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를 위한 제언을 하며 마친다. 

역사적 배경
오트하인리히(Ottheinrich)의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정신은 독일 전역에 퍼져갔고 선제후 령 팔츠에도 들어왔다. 1517년의 팔츠의 선제후는 루드비히 5세였는데, 형식적으로는 1544년 그가 죽을 때까지 동생 프리드리히2세와 함께 통치했다. 루드비히 5세가 죽자 1544년부터는 프리드리히2세가 선제후가 되었다. 이 두 선제후는 종교개혁정신이 팔츠에 퍼져나가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지원했다. 예를 들어 보름스에서 종교개혁정신에 의한 설교를 하다가 쫓겨난 하인리히 슈톨(Heinrich Stoll)을 받아들여 하이델베르크의 성령교회와 궁중 설교자로 세웠을 뿐 아니라 신학부에서 교수로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나 정치 외교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로마 가톨릭적 입장을 고수했고 카를 5세 황제 아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 카를 5세의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돈독한 관계였다. 그러나 1545년 성찬식에서 선제후와 고관들이 떡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적어도 선제후 개신의 동의와 나아가 팔츠 귀족과 고관들의 종교개혁에 대한 적극적 찬성을 의미했다. 1546년 새로운 교회법이 마련되었고, 개신교지역 연합인 슈말칼덴 연맹과 카를5세가 전쟁할 때 작은 군대를 보내 슈말칼덴 연맹을 도왔다. 그런데 이 전쟁이 카를 5세의 승리로 끝나자 선제후 령 팔츠는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카를 5세는 자기를 배신한 프리드리히2세를 엄중히 꾸짖고 황제선거에 참여하는 권한 곧 선제후 호칭을 빼앗으려고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 앞에서 세 번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구했고, 황제의 종교정책을 받아들이고 지원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선제후’의 직위를 지켰다. 프리드리히 2세가 늦게 시도한 종교개혁의 작은 노력은 그렇게 힘을 잃었다. 그래서 팔츠는 겉으로는 계속 로마 가톨릭을 유지했다. 
1556년 프리드리히 2세가 자녀없이 죽자 조카 오트하인리히가 새로운 선제후가 되었다. 오트하인리히는 다 방면에서 지식과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팔츠-노이부르크(Pfalz-Neuburg)라는 작은 공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1540년 즈음에 종교개혁신앙을 개인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1542년 자기 공국에 공식적으로 개신교가 들어오도록 했다. 슈말칼덴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개신교를 위해 싸웠다. 분노한 카를 5세의 군대가 그의 공국을 침략해서 점령했다. 그러나 오트하인리히는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고 황제에게 어떤 용서도 빌지 않고 화해를 거절한 인물이었다. 
오트하인리히가 팔츠를 물려받기 바로 전해인 1555년 9월에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1556년에는 종교개혁에 따른 정치적 위험성은 거의 없었다. 이 평화협정의 핵심적인 내용은 라틴어로 ‘Cuius regio, eius religio’ 번역하면 ‘그의 지역에는 그의 종교’다. 개신교와 계속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루면서 힘을 잃고 구석에 몰린 황제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협정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한 지역이 로마가톨릭이나 개신교로 결정되는 것이 그 지역의 통치자의 권한에 맡겨져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개신교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받는 종교를 의미했다. 
따라서 오트하인리히가 선제후령 팔츠의 선제후가 되자 적극적으로 종교개혁을 실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556년 4월 16일 오트하인리히는 미사를 금지하는 임시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새로운 교회법을 반포한다. 이 교회법은 1553년의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교회법을 따라 작성된 것이었다. 이 법은 신앙고백서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를, 요리문답서로는 루터주의자 요하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의 것을 받았다. 
그 외에도 오트하인리히는 개혁을 위해 몇 가지 중요한 일을 계속 진행했다. 먼저 시찰단을 보내 자기 지역 교회를 시찰하게 한 것이다. 시찰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팔츠지역은 아직까지 로마교회의 예식과 그림과 제단 등이 사용되고 있었다. 선제후는 그림들과 제단들을 교회에서 치울 것을 명령했다. 문서적인 개혁의 허용이나 조치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혁을 실행했으며, 개혁이 자신의 확고한 의지인 것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행정적인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팔츠의 종교개혁의 공은 오트하인리히에게로 돌아간다. 
이 시기 종교개혁 진영은 성만찬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성만찬의 떡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께 한다는 루터주의자들과 여기에 반대하는 스위스 진영이 점차로 갈라지고 있었다. 1549년 칼빈과 불링거가 취리히협의서(Consensus Tigurinus)라 불리는 성만찬에 관해 일치에 이르자 루터주의자들은 취리히만이 아니라 제네바에 대해서도 극렬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반대자를 칭하는 용어 츠빙글리주의자(Zwinglian)에는 칼빈주의자(Calvinian)가 덧붙여졌다. 오트하인리히가 팔츠를 통치하는 기간 이 긴장은 유럽전체에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트하인리히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몇 명의 명성있는 학자들을 모았을 때 강한 루터주의자인 틸레만 헤스후스(Tilemann Heshus)만이 아니라 츠빙글리주의자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와 칼빈주의자 피에르 보퀴누스(Pierre Boquinus)도 있었다. 에라스투스는 의학부교수였으나 신학적 식견이 뛰어났고 팔츠교회의 일을 결정하는 교회회의(Kirchenrat)의 회원이었다. 보퀴누스는 신학부교수로서 교의학을 가르쳤다. 개혁파인 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헤스후스는 제일교수로서 신약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선제후령 팔츠의 총감독(Generalsuperintendent)이었다. 각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있었던 결정적인 신학적 견해의 차이는 결국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의 개혁주의 노선



루터파와 개혁파의 갈등은 숨겨질 수 없었고 오트하인리히 생전에 이미 한 번 터져나왔다. 독일 서북부 프리스란트(Friesland)는 개혁파의 영향이 강했던 지역인데, 이 지역에서 온 스테판 실비우스(Stephan Silvius)라는 학생이 박사학위취득을 위한 방어식을 가지려고 했을 때였다. 당시 신학부 학장이던 헤스후스는 이 학생에게 “주의 만찬에서 단순한 표를 받아들이는 츠빙글리주의자들의 오류”란 주제를 줬다. 츠빙글리 편에 있던 실비우스는 이 주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총장이던 에라스투스는 이 문제를 대학평의회로 가져갔다. 이 회의에서 신학부 부학장이던 보퀴누스에게 실비우스의 방어식을 맡기기로 했으나 헤스후스는 거절했다. 이 문제는 선제후자문회의에 올라갔고 거기서 대학평의회의 결정대로 하도록 했으나 헤스후스가 결정을 따르지 않자 헤스후스가 대학평의회에 참석할 수 없도록 했다. 이렇게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던 때 1559년 2월 12일 오트하인리히는 죽었고 갈등의 해결은 새로운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맡겨졌다.
결국 실비우스는 개혁파의 성만찬론을 옹호하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나 성만찬의 갈등은  헤스후스와 빌헬름 클레비츠(Wilhelm Klebitz) 사이에 계속되었다. 클레비츠는 학생이자 성령교회의 부교역자였는데 헤스후스가 하이델베르크를 잠시 떠나 있는 동안 클레비츠가 개혁파 성만찬론을 주제로 삼아서 학사학위를 받자 갈등이 폭발했다. 헤스후스는 강단에서 클레비츠를 비난했고 클레비츠도 헤스후스를 비난했다. 프리드리히3세는 둘을 중재하려고 했으나 격한 성품을 가진 이들을 말릴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표현인 “떡 안에”나 “떡 아래” 등의 표현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헤스후스는 프리드리히 3세의 이 조치를 비판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고, 1559년 9월 결국 헤스후스와 클레비츠를 해임시키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 멜란히톤에게 특사를 보냈다. 
멜란히톤의 답장은 11월에 도착했다. 멜란히톤은 프리드리히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와 성만찬논쟁에 대한 공적 평가서 두 가지 답장을 보냈다. 개인적인 편지에서 두 사람을 해임시킨 프리드리히3세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옹호했다. 평가서에서 멜란히톤은 당시 논쟁이 되는 성만찬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성만찬의 유익이 고전 10:16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것에 있는데, 특히 이 교통(κοινωνία)과 연합(consociatio)이 성례를 실행할 때 생긴다고 했다. 

“[사도바울은] 교황파처럼 떡의 본성이 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브레멘 파처럼 떡이 그리스도의 본성적 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헤스후스처럼 떡이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통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 연합은 [성만찬예식] 실행에서 생기는데, 마치 쥐들이 떡을 씹어 먹는 것처럼 지각없는 것이 아니다. ... 거기서 확실히 믿는 자들에게 효과가 있다. 그리고 떡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함께 하신다. ... 그러나 이 유익에 대한 참되고 단순한 교리를 어떤 이들은 변장한 것이라고 하면서, 마치 떡 때문에 이 성례가 세워지고 교황의 예배가 세워지는 것처럼 몸이 떡 안에 있는지 또는 떡의 나타남에 있는지 말해지기를 요구한다. 나중에 그들은 몸이 어떻게 떡에 포함되었는지를 생각해냈는데, 어떤 이들은 변화를, 어떤 이들은 본질변화를, 어떤 이들은 [몸의] 편재를 생각해냈다.” 

멜란히톤이 ‘강한 루터파’(Gnesio Lutheran)의 입장을 거절하고 칼빈의 입장에 가까이 간 것이 확인되자 개혁파는 만족했고 헤스후스는 자기 스승 멜란히톤에 대해 반대하는 책을 저술했다. 다음해 4월 멜란히톤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보낸 성만찬에 대한 이 평가서 때문에 멜란히톤은 강한 루터파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하이델베르크의 개혁주의자들에겐 큰 힘이 되었다. 멜란히톤은 당시 독일 개신교에서 큰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개혁파는 멜란히톤의 권위에 기대어서 자신들의 성만찬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3세도 자신이 헤스후스를 해임시킨 명분이 확보되었으며, 나중에 멜란히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떠나라고 할 수 있었다. 멜란히톤의 평가서는 1560년에서 1561년 사이 열 번이나 넘게 인쇄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가 개혁파 성만찬론에 더 큰 확신을 갖게 하는 계기가 있었다. 1560년 6월 프리드리히 3세의 딸의 결혼식에 맞춰 사위인 작센-고타(Sachsen-Gotha)의 통치자 요한 프리드리히(Johann Friedrich)가 왔다. 요한 프리드리히는 강한 루터주의자의 편에선 자로 장인의 노선을 우려하면서 장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신학자 두 사람 요한 슈토셀(Johann Stössel)과 막시밀리안 뫼를린(Maximilian Mörlin)을 데리고 하이델베르크로 왔다. 그리고 루터파 신학자 슈토셀과 하이델베르크의 개혁파 신학자 보키누스 사이에 공식적인 논쟁이 있었다. 논쟁이 시작되자 개혁주의자 보키누스는 프랑스출신으로 독일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말하는 방식도 큰 소리로 말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개혁파의 생각이 분명하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프리드리히 3세는 에라스투스에게 보키누스를 돕도록 지시했다. 에라스투스가 보키누스 옆에서 개혁파의 입장을 분명히 제시했다. 그리스도의 참된 몸에 참여하는 것은 영을 위한 양식이지 몸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는 것이 설득력있게 설명되었다. 이 논쟁 후에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는 성만찬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순수한 교리를 지키고 보호하기로 더 강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팔츠에 개혁주의에 견고히 서기 위해서는 중요한 정치외교적인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관련한 문제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평화협정에 의해서 신성로마제국은 개신교와 로마가톨릭 둘 다 허용되었는데, 개신교의 경우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받는 것이 조건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두 가지 종류 즉 1530년에 나온 것과 후에 성만찬에 대해 작은 수정을 한 1540년 판이 있었다. 앞에 것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비변경판’(Confessio Augustana invariata, CA)으로, 뒤에 것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변경판’(Confessio Augustana variata, CAV)으로 불린다. 둘 다 멜란히톤이 작성한 것이다. 이 두 판의 가장 큰 차이는 성만찬론에 있었다. 1530년 판(CA)은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의 형체 아래 현존한다”라고 해서 강한 루터파의 주장에 가까이 있다. 반면 1540년 판(CAV)은 “빵과 잔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제시된다”라고 해서 개혁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개혁주의 노선으로 마음을 정한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당연히 변경판을 마음에 들어 했다. 1561년 1월 나움부르크(Naumburg)에서 개신교 통치자들이 모여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개신교신앙을 다시 확인하려고 했을 때,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로 토론이 벌어졌다. 사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평화협정 때 사용된 신앙고백서는 1540년 판이었으나 강한 루터파 지역의 통치자들은 1530년 판만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감동적인 연설로 1540년 판도 함께 인정받도록 했다. 개혁주의 노선으로 가야할 팔츠의 미래를 위해서 이것은 중요한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팔츠가 정치 외교적으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평화안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팔츠가 개혁주의를 드러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만들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외교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프리드리히 3세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변경판도 인정받도록 했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교적인 면에서 하이델베르크에 개혁주의를 들여올 명분을 확보한 프리드리히 3세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팔츠교회의 개혁의 확립이었다. 비록 개혁주의로 노선을 정했으나 교회에는 여러 가지 개혁의 문제가 있었다. 아직 로마 가톨릭의 잔재가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오트하인리히는 그림과 건축물과 여러 장식품들과 여러 제단들을 없앴으나 제단 하나를 남겨두는 것은 허락했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그것을 위험한 것으로 생각해서 없애버리고 성만찬 상으로 대체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상, 촛대, 그림도 다 치우도록 명령했다. 예배에 있어서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하도록 해야 했으며 성만찬에서도 빵과 잔 둘 다 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잘 전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올레비아누스는 한 교인이 동전모양의 성찬용 제병을 받아들고 떨며 높이 올려 경배하는 것을 목격했다. 팔츠교회는 떼어진 빵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성만찬 예식을 시작했다. 이렇게 팔츠교회에는 예배당 및 예배 모습 속에서 여러 교정되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팔츠는 로마가톨릭에서 종교개혁을 한지 5년이 되기 전에 성만찬 논쟁으로 신학적 혼란을 겪은 처지였으므로, 정리해서 바른 내용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팔츠교회에는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없앤 예배모범이 포함된 교회법과 바른 내용을 가르칠 교안인 요리문답서가 필요했다. 마침 두 사람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하이델베르크에 왔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들을 독려해서 요리문답서와 교회법이 나오도록 했다. 

작성과정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구체적인 작성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등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 작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무려 20세기 초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이 요리문답서의 공동저자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17세기 초 하이델베르크의 교수였던 하인리히 알팅의 주장에 따른 것으로 19세기에 처음 비판받게 되고, 400 주년을 지나면서 많은 토론이 있었다. 결국 현재는 올레비아누스가 비록 작성위원회의 한사람이었지만 우르시누스와 같은 수준의 작성자는 아니었다고 학자들은 결론 내렸다. 그러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누가 작성했을까? 현재 학자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작성위원회의 공동 저작물로 칭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동시에 작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우르시누스라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는 먼저 우르시누스의 역할에 주목해 볼 수 있다. 1562년, 즉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앞두고 우르시누스는 두 가지 중요한 요리문답서를 작성했다. 하나는 일반대중과 어린이를 위한 것으로 소요리문답서(Catechesis minor)라 불리며, 다른 하나는 신학입문자들을 위한 것으로 신학요목문답(Catechesis, Summa Theologiae) 또는 대요리문답서(Catechesis maior)라 불린다. 소요리문답서는 그 전체 구성과 문답 내용의 유사성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초안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대요리문답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와의 관련성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권징 등의 부분은 소요리문답서보다는 대요리문답서와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구체적 자료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작성과정에 대해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자료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남긴 편지들과 여기에 대해 언급한 강의안들이다. 1562년 3월 우르시누스는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이미 백성들과 우리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적당한 요리문답 양식을 작성하고 있고 교회사역과 교회권징의 방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1562년 3월에 요리문답서가 작성 중에 있었고, 교회법 작성에 착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술이다. 또 1562년 9월 1일 우르시누스가 교의학교수 취임강연 중에 청소년을 위한 요리문답서를 조금 후에 갖게 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강의에는 더 자세한 요리문답서가 사용될 것을 말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1562년 3월 준비 중이었고, 9월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리하면 우르시누스의 소요리문답서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초안으로 활용되어서 1562년 내내 수정 보완되는 동안 대요리문답서가 작성되어서 참고자료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두 요리문답서의 정확한 작성시기 등 진행상황은 알 수 없다. 
우르시누스의 제자 로이터에 따르면 두 요리문답서가 작성위원회에 제출되어 받아들여져 소요리문답서의 많은 내용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요리문답서 작성위원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우르시누스나 몇몇 특정인들의 저작으로 돌릴 수 없고 바로 이 위원회로 돌려야 한다. 그런데 이 위원회에 어떤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구체적인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프리드리히 3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초판에서 신학부 교수들 전체, 모든 감독들, 훌륭한 목회자들이 함께 협력했다는 것을 언급하는 데서, 어느 정도 추축할 뿐이다. 그 외에 토마스 에라스투스도 참여했다는 것을 볼 때에 신학자나 목회자는 아니나 역량있는 팔츠의 지도자들, 교회위원회의 위원들이 소속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우르시누스가 작성한 초안이 교회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다루어지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리문답서 완성본이 1563년 1월 13일 승인을 받기 위해서 교회 회의에 올려졌다. 루터주의 편에 서 있던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다 찬성했다. 찬성한 이들이 18일 새로운 요리문답서에 서명하면서 요리문답서가 공식적으로 교회회의를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월 19일 프리드리히 3세가 요리문답서의 필요성과 목적에 대한 서문에 서명하면서 인쇄소로 넘겨졌다. 2월과 3월 인쇄를 거친 요리문답서는 팔츠에 전파되면서 바른 교리를 위한 신앙교육이 전파되었다. 



새로운 교회법은 올레비아누스가 주도했다. 올레비아누스가 교회법의 주저자이거나 최소한 핵심적인 부분의 대부분을 작성했을 것이라 평가된다. 그 증거는 교회법에 대해 논의하는 올레비아누스와 칼빈 사이의 서신들이다. 1560년에서 1563년 집중해서 교회법에 대해 논의했는데, 주로 올레비아누스가 묻고 칼빈이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1560년 4월과 9월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에게 제네바의 교회법에 대해 물었다. 교회권징과, 예식들, 심방, 환자방문 등에 대해서 물었다. 1560년 11월 칼빈은 제네바에서 어떻게 목사가 세워지는지, 세례예식을 어떻게 거행하는지, 성만찬을 위한 심사를 어떻게 하는지 등 교회생활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1562년 교회권징에 대한 중요한 논의가 편지를 통해서 한 번 더 있게 된다. 1563년 4월 올레비아누스가 보낸 편지에서 제네바 교회법이 독일어로 번역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제네바 교회법은 “프랑스개신교회법”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네바 교회의 많은 영향을 받은 팔츠의 교회법이 1563년 11월 세상에 나왔다. 이 교회법의 심장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놓여있고 교회법 전체에 요리문답서의 내용이 흐르고 있다. 

필요성과 목적

팔츠교회에서 요리문답서와 교회법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요리문답서가 그 내용이라면 그 실천의 방법을 규정한 교회법은 내용을 담는 그릇과도 같다. 선제후는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외적 예식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의 바른 지식으로 인도되기를 원한다. 즉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교리교육만이 아니라 예식과 실천 전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한 신앙교육의 장이다. 따라서 요리문답서와 교회법은 같은 필요성과 목적을 갖는다. 실제로 교회법의 서문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초판 서문에서 말했던 필요성과 목적을 요약한 후 교회법에도 똑같이 연결시켜 말한다. 교회법에서 반복하여 말하는 요리문답서가 필요한 이유는 ‘오류’(unrichtigkeyt)와 ‘불일치’(ungleichheyt) 때문이다. 그래서 확실한 요리문답서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식과, 성례의 집례와 다른 실천들에서 똑같이 ‘바름’(richtigkeyt)과 ‘같음’(gleichförmigkeyt)이 요구된다. 교회법의 서문은 상대적으로 짧을 뿐 아니라, 그 필요성과 목적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서문에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선제후가 요리문답서 초판에서 밝히는 내용을 고찰하는 것이 의미있을 것이다. 

소명의식 

초판 서문은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교회와 학교의 사역자들에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필요성과 목적을 밝히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공포하는 선제후의 자기 소명의식을 가장 먼저 만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의무가 단순히 백성들의 삶을 평화롭고 평안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능하신 이와 그의 구원하는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를 가르치고 거기로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라는 선제후의 소명의식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제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후대에 전달되어야 하며, 후대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권위를 두고 경외하기를 원했으며, 자신이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온갖 수고를 다했으며 예상되는 희생을 치를 각오를 했던 것이다. 팔츠의 신앙교육의 출발점은 이런 소명의식 곧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였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위한 소명의식은 종종 간과되어지나 이것 없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팔츠의 상황

이런 소명의식 아래서 선제후는 두 가지 상황을 언급한다. 첫째, 더 나은 개혁을 위한 열망이다. 프리드리히 3세 이전 선제후들도 개혁을 시도했었고 오트하인리히의 경우 실질적인 팔츠의 종교개혁을 이뤄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선임자들이 만들어 놓은 규례와 조치들을 유익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바라던 열매들을 맺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프리드리히 3세가 선임자들의 규례와 조치들을 다시 되풀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개혁하고 선명하게 해서 계속 실행하게 했다고 진술한다. 
프리드리히 3세가 언급하는 첫 번째 상황은 팔츠가 처한 형편을 보여준다. 프리드리히 2세가 몇 가지 조치들을 취했고 오트하인리히가 교회법을 개혁했지만 아직 팔츠의 형편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선임자의 규칙과 조치들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겠다고 밝히는 것은 루터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갈림길에서 멈출 수 없는 상황을 암시한다. 이제 팔츠는 개혁을 향하기 위해서 (in Verbesserung zu richten) 새로운 요리문답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두 번째 젊은이들이 처한 형편을 언급한다. 프리드리히 3세가 발견한 팔츠교회의 현실은 “피어나는 청춘들이 학교와 교회에서 기독교 교리를 아주 경솔하게 또는 한편 전혀 가르침을 받지 않거나, 한편 다르게 또는 지속적이고 확실하고 통일적인 요리문답서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과 판단에 따라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신앙교육의 부재 또는 제멋대로의 신앙교육으로 여러 잘못된 결과들이 나오게 되는데, 특히 “그들이 종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말씀지식 없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일치하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또는 그렇지 않으면 계속되는 쓸모없는 질문들로 또 이따금 이질적인 교리로 시달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염려가 프리드리히 3세의 염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이 염려의 핵심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가 서문에서 자주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그가 팔츠의 통치자로서 갖는 소명의식의 핵심이었다. 팔츠의 통치자로서 그의 소명의식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로 자기의 공민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 없이 자라나는 것이 이 소명의식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이델베르크가 나오게 된 배경 또는 이 요리문답서의 바탕에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지향점 

프리드리히 3세의 소명의식과 더 나은 개혁을 위한 열망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교육부재라는 상황은 팔츠를 위한 요리문답서를 만들게 한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이러한 동기로 선제후가 요리문답서를 만들 때 두 가지 기본방향을 세웠다. 요리문답서가 지향하게 될 두 방향은 ‘바름’(Richtigkeit)과 ‘같음’(Gleichheit)이다. 즉 팔츠는 요리문답서를 통해서 바른 교리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된 교육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름과 같음은 한 묶음으로 서문에 자주 등장한다. 청소년들이 처음부터 “순수하고 같은 형식의 교리로”(zu reiner / auch gleichförmiger lehr) 배워야 한다. 요리문답서를 통해서 “오류와 상이성”(unrichtigkeit und ungleichheit)을 없애야 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인 청소년들은 “경건한 가르침을 통일되게” 가져야 한다. 가르치는 자들인 설교자와 교사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날마다 다른 것을 문답하면 안되며”(같음을 위하여), “그릇된 교리를 도입하면 안된다”(바름을 위하여). 이처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반포하며 그의 마음에 그렸던 팔츠 교회의 모습은 바르고 같은 신앙 정신 아래에 있었다. 
‘바름’과 ‘같음’을 위하여 팔츠교회가 산출한 것은 ‘요리문답서’(catechismus)였다. 바름과 같음은 아무 목적 없는 것이 아니라 첫 출발점이었던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목적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요리문답서에 연결되는가? 프리드리히 3세의 서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와 요리문답서에는 어떤 모순이나 갈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이 요리문답서이기 때문에,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육 또는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만든 것이다.” 이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이 곧 기독교교리를 가르치는 것이고, 이 요리문답서의 가르침과 성장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3세가 진술하는 신앙교육의 목표는 단순한 교리적 지식에 대한 교육이나 교리적 개혁이 아니라 삶 전체의 개혁이었다. 선제후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말씀을 “모든 덕과 순종의 유일한 기초로”(als dem einigen fundament aller Tugenten und gehorsams) 규정한다. 따라서 “훈육과 정직과 다른 모든 선한 덕들”은 어려서부터 교리와 복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르칠 때 가능하다. 서문을 마무리하면서 프리드리히 3세는 가르치는 자들 즉 교회의 목사들과 교사들에게 그들이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만을 당부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가르치고 행하고 살기(lehre/ thun und leben)를 권한다. 정리하면 프리드리히 3세에게 신앙교육과 생활교육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신앙교육이란 성품과 인격과 생활로 나아가서 덕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단순한 교리적 정보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한 덕들을 갖추며 삶으로 살아내는 것까지를 의미했던 것이다. 
신앙교육의 영향이 생의 모든 부분까지를 포함했을 때, 이런 영향은 피교육자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신앙교육에 참여하는 공동체 전체에게 나타난다. 팔츠의 신앙교육의 직접적인 대상은 자라나는 이들이지만 그 유익을 그들만 갖는 것이 아니다. 서문에 의하면 이 신앙교육을 교회의 사역자들만의 의무로 말하지 않는다. 교회의 직분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직분자들, 정부와 가정을 언급한다. 즉 신앙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학교와 부모, 나아가 사회전체가 된다. 선제후는 사회전체가 신앙교육에 참여하므로 모든 덕목들이 교육대상인 자들만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자라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라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과 말씀에 대한 지식에 대한 교육을 소홀이 한다는 것은 직접적인 후대의 세대만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사회전체가 소홀한 것이고, 유익들을 잃게 된다는 의미다. 신앙교육에 참여하는 전 구성원이 유익을 갖지만, 소홀히 할 때는 전 구성원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다. 

팔츠교회법에 나타난 신앙교육

요리문답서의 내용은 교회실천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문서로만 남을 것이다. 요리문답서는 보물창고에 보관할 문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적용되고 활용되어야 했다. 팔츠교회 지도자들은 요리문답서가 적용된 교회법을 만들어 교회실천에서 요리문답서의 내용이 적용되도록 했다. 따라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팔츠교회법의 심장이다.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 면에서, 첫째 교회법에서 지시하는 요리문답서를 교육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통해서, 둘째 교회법 전체에서 등장하는 요리문답서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것이다. 



교회법의 요리문답서 소개

팔츠교회법(1563)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첨부하기 전에 ‘요리문답서에 대하여’(Vom catechismo)란 제목 아래 요리문답서에 대해 소개한다. 다음과 같은 요리문답서에 대한 정의로 시작한다. 

“우리 기독교에서 요리문답서란 기독교교리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 짧고 간결하게 구두로 하는 설명인데, 여기서 어린 자들과 잘 모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배운 것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물어보고 들어보는 것이다.”

이 짧은 정의 이후에 요리문답서는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이 초대교회부터 있어왔던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이미 처음부터 교회의 신앙교육의 현장은 가정과 학교와 교회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초판에서 교육기관이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과 학교에까지 연결했다는 것을 볼 때, 여기서 가정, 학교, 교회 이 세기관이 신앙교육을 담당했다는 것은 당연한 연결이다. 신앙교육기관으로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 그리고 학교까지 포함하여 언급하는 것은 자주 나타난다. 
교회법은 계속해서 신앙교육의 이유를 언급함으로써 신앙교육의 당위성을 말한다. 교회법은 세 가지 이유를 지적한다. 첫째, 본성적 악함이 세력을 갖고 있고, 그에 따라서 교회와 정치권력이 부패하는데, 그 때에 유익한 교리로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는 교회와 정치의 부패의 성향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부패의 성향을 대항하는 것이 유익한 교리이다. 
둘째, 주님의 분명한 명령 때문이다. 교회법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을 명령하는 성경구절들(출 12:26-27; 13:8-9, 14, 신 4:37-40; 6:1-9; 11:18-21)을 나열하고 신 6:6-7을 직접 인용한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셋째, 구약교회와의 통일성 아래서 신앙교육의 근거를 말한다.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할례이후에 (그 때 그들은 이해력이 없을 때인데) 언약의 표의 비밀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교육받은 것처럼, 역시 우리 어린이들도 그들이 세례받은 때부터 기독교신앙과 회개가 가르쳐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의 만찬식탁에 허락되기 전에, 전체 기독교회 앞에서 그들의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여기서 팔츠교회법은 요리문답을 사용하는 하나님의 명령(너희 자녀가 묻기를...)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교회에서 계속 있었던 이 신앙교육이 견진례로 대체되면서 사라진 것처럼 진술해서, 요리문답 교육 자체가 견진례에 대한 개혁인 것을 암시한다.

요리문답서교육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전체를 첨부하기 전에 ‘그래서 요리문답이 아래의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Soll derhalben der catechismus auf nachvolgende form gehalten werden)는 제목 아래서 그 주된 활용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팔츠교회법은 요리문답서를 단순히 첨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도울지 알려주는 것이다. 

요리문답서 낭독

교회법이 정한 활용방식은 크게 세 가지 곧 요리문답서 낭독, 요약 낭독, 설교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요리문답서 낭독에 대해서 살펴보자. 매 주일과 휴일에 마을과 도시에서 설교하기 전에 목사는 요리문답의 한 부분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회중에게 읽어주어야 했다. 요리문답서의 낭독은 공예배의 중요한 순서를 차지한 것이다. 회중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이라고 강조한 것에서 우리는 당시 대부분의 성인이 문맹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맹이었던 회중들이 어떻게 하면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서 또는 요리문답서를 알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첫 번째 해결은 바로 낭독이었던 것이다. 교회법은 구체적으로 이 낭독의 범위를 정한다. 첫 번째 낭독: 1-11문, 두 번째: 12-28문, 세 번째: 29-45문까지, 네 번째: 46-58문, 다섯 번째, 59-74문, 여섯 번째: 75-85문, 일곱 번째: 86-103문, 여덟 번째: 104-115문, 아홉 번째: 116-129문. 그리고 열 번째에는 회중 각자 자신의 소명을 기억하게 하는 성경본문을 낭독해야 했다. 이것을 정리하면 요리문답서를 아홉 번으로 나누어서 아홉 번의 주일이면 요리문답서 전체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열 번째 주에 회중의 소명에 대한 성경구절을 낭독하는 것 까지를 포함하여 10주가 걸렸다. 이런 낭독의 방식이 적용될 때 팔츠의 성도들은 일 년이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다섯 번 반복해서 들을 수 있었다. 팔츠의 성도들은 매주 반복되는 요리문답 낭독을 통해서 요리문답서의 내용에 자연스럽게 익숙해 질 수 있었다. 

요리문답서 요약 낭독

두 번째, 요리문답서 요약 낭독이 요리문답서의 교육의 중요한 한 방법이었다. 팔츠교회법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와 함께 바로 뒤에 요리문답서의 요약을 첨부했다. 교회법에 의하면 주일에 도시에서는 세 번 (오전에 한번, 정오에 한번, 오후에 한번), 시골에서는 두 번 (오전, 오후) 예배를 드렸다. 도시에서는 요리문답서 요약이 두 번째 예배의 설교 전에 낭독되었고, 시골에서는 오후 예배 순서 중 십계명을 낭독하는 시간에, 십계명 낭독 대신 요리문답서 요약을 낭독하도록 했다(요리문답서 요약에 십계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가지를 알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지, 둘째 우리가 거기서 어떻게 구원받는지, 셋째,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는 어떤 것들인지. 1.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아는데, 거기에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 요구되었다. ... 2. 어떻게 모든 우리의 죄값이 완전히 치루어졌고 세상시작부터 택함받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비참함으로부터 구원받았는지 하나님께서 거룩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 3.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를 우리는 역시 하나님의 율법에서 배운다. ... ”

이렇게 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에 대한 전체 요약이 매주일 회중에게 읽혀지게 되었다. 따라서 팔츠 교회 성도들은 매주일 전체 요약을 들으면서 그 핵심적인 내용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10주에 한 번씩 요리문답서 전체를 듣게 되고, 매주일 요약을 듣게 되는 것이다. 팔츠교회법을 따르면 성도들은 출석하여 예배드리는 것만으로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에 인이 박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리문답서 설교

세 번째는 요리문답서를 통한 신앙교육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문답서 설교다. 팔츠교회법은 매주일 오후마다 각 지역마다 적당한 시간에 요리문답서설교를 하도록 규정했다.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시편송(독일어)-주기도문-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이해를 위한 기도-십계명 낭독(오후에 한번만 예배드릴 경우에는 요리문답서 요약 낭독)을 한 후 요리문답서 설교를 하게 된다. 
교회법은 요리문답서 설교를 하는 방법도 자세하게 정한다. 설교자가 먼저 집중하는 대상은 아직 질문을 배울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요리문답서의 질문과 내용을 천천히 알려준다. 그 다음은 청소년들을 향한다. 그들에게 배웠던 것과 배울 것을 암송하게 하는데, 온 회중 앞에서 하게 한다. 청소년들은 이 내용을 이미 학교와 가정에서 암기해 와야 한다. 요리문답서가 주일단위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청소년들은 해당 부분을 암기해 오면 된다. 목사가 묻고 청소년 들 중 몇이 답하는 순서가 끝나면 목사는 요리문답서의 내용을 해설한다. 교회법은 이 요리문답서 설교가 일 년에 한번은 요리문답서 전체를 다루어야 할 것을 규정한다. 이 해설은 회중전체가 듣게 되므로 성인들도 참여한다. 목사는 처음에는 배울 수 없는 작은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배우고 암송할 수 있는 청소년들을 향하고, 마지막에 그 해설을 통해서 성인을 포함한 회중 전체가 참여하는 모양을 갖추게 된다. 
요리문답설교에서 묻고 암송하게 하는 것이 아이들을 무섭게 하는 행위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미 오트하인리히 때도 요리문답이 가르쳐지도록 했는데, 아이들이 요리문답서를 무서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가르치고 친절히 사랑스럽게 대우할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하면 팔츠의 신자들은 일 년이면 요리문답서를 다섯 번 통독하게 된다. 52번 요리문답서 요약을 듣는다. 일 년에 한번은 요리문답서 전체의 해설을 듣게 된다. 청소년의 경우 매주일 두 주 분량의 내용을 암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요리문답서는 이 당시 그들에게 특별해서 낯선 것이 아니라 항상 옆에 있는 익숙한 것이 되어야 했다. 팔츠교회법은 무엇보다 먼저 요리문답서가 그들의 일상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매주 그 해설을 통해 그 의미를 익히게 했다. 

교회법 전체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내용은 단순히 특정한 활용방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실천 전체를 통해서 전달되어야 했다. 예를 들어, 환자심방에서 목사는 요리문답서 제 1문을 가지고 위로해야 한다. 이처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전체가 첨부되었고 구체적인 교육 방법에 대한 지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법 곳곳에서 요리문답서의 흔적이 나타난다. 여기서는 중요부분인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예식에서 어떻게 요리문답서가 나타나는지 살펴본다. 

요리문답서와 설교

설교는 팔츠교회법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부분이다. ‘교리와 설교’(von der lehr und predigt)라는 제목 아래서 설교에 대해서 말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팔츠교회법은 설교를 이 영생과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규정한다. 택함받은 자들을 이 지식과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설교를 정하셨고, 이 땅에서는 설교라는 수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생이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인 자신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리는 무엇인가? 팔츠교회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리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으로 보고 있다. 이 교회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를 알려주는데, 즉 첫째 인간이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을 향하게 하고, 둘째 어떻게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받을지 가르치며, 셋째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게 이 구원에 대해 감사할지 알려준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세 구도이다. 여기서 신구약성경과 설교와 요리문답서는 분리되지 않는다.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도록 성경을 주셨는데, 이 성경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 설교이고, 설교의 내용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내용과 같기 때문이다. 요리문답서는 설교자의 성경해석에도 관련된다. 왜냐하면 교회법은 설교자는 자신의 본문에서 이 세 가지(비참-구원-감사)를 볼 것을 권하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법을 따른 다면 팔츠지역의 교회에서 선포되는 모든 설교에는 비참과 구원과 감사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법은 계속해서 설교자는 상처에 필요한 약을 옳게 사용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하며, 나아가 요리문답의 항목들이 회중이 잘 이해되도록 회중의 이해력에 맞출 것을 권고한다. 팔츠 교회법이 요리문답서의 내용이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서 이 내용이 가르쳐지기를 권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설교는 교리설교라고 부르는, 즉 (이미 위에서 다룬) 주일 오후에 진행된 요리문답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후의 요리문답 설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성경해석과 설교에서 요리문답서의 내용이 나타나야 할 당위성을 팔츠교회가 권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신구약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그들의 확신을 볼 수 있다. 

요리문답서와 세례

세례예식에서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발견된다. 교회법은 세례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해서 말한다. 유아들도 어른들처럼 믿음을 주는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기 때문에 세례로부터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마 28:19-20의 세례와 가르치는 것이 함께 있다는 것을 근거해서 설교의 직분을 맡은 자가 세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진술하면서 설교와 세례는 한 명령이며 한 직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명령을 분리해서 설교직이 금지된 자에게 세례집례가 허락되는 것은 어떤 피조물에도 합당하지 않다.” 즉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신앙교육이라고 할 때에 세례는 처음부터 신앙교육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례예식서에는 이런 교육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예식 후 감사기도문에 “아이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하나님의 복받으며 양육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기를” 구한다. 그리고 감사기도 후 권면에서 교육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시여, 친구, 친척, 특히 아버지와 세례입회인 그대들은 이 아이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계시하시고 신구약에 모아주신 기독교신앙의 조항과 교리를 따라 바른 지식을 갖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주 그리스도를 위해 양육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셔야 합니다.”
이 문구가 포함된 세례예식서가 마치면 바로 ‘요리문답서에 대하여’(vom catechismo)가 이어진다. 세례를 다루고 요리문답서를 다루는 연결방식에서 그 의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분명히 세례받은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생각한 것이다. 세례를 다루고 바로 성만찬을 다루어야 할 것 같지만 성만찬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요리문답서 뒤에 와서 마치 성례가 분리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구도(설교-세례-요리문답서-성만찬)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이 주어지고, 언약의 표인 세례를 받으며, 세례받은 주의 백성은 말씀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으면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세례받은 아이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계시하시고 신구약에 모아주신 기독교신앙의 조항과 교리를 따라 바른 지식을 갖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주 그리스도를 위해 양육”되는 일에 요리문답서가 분명히 필요하고, 그렇게 양육된 자녀는 주의 만찬에 참여한다. 그래서 요리문답서 첨부 후에 생애 처음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신자의 자녀에 대해 규정하는 것은 교회법의 순서에 맞게 보인다. 

요리문답서와 성만찬

교회법에는 성만찬이 있는 주일 전 토요일에 성만찬 준비 예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다. 이 때 요리문답서와 교회법에 있는 성만찬예식을 따라 바른 이해와 사용을 설교한다. 성만찬은 신앙고백과 함께 참여해야 하므로 설교 후에 심사를 했는데, 이 때 사용된 것이 십계명과 주기도문과 요리문답서에 있는 성만찬에 대한 부분을 암송할 수 있는지가 체크되었다. 모든 심사를 마친 후에 청중에게 세 가지 긴 질문을 던져 다시 한 번 신앙을 확인하도록 했는데, 이 세 질문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세부분의 요약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음 세 가지 부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첫째 우리의 죄, 둘째 우리의 구원, 셋째 감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죄책이 있습니다. ... 우리가 이것들을 전혀 지키지 못했으며 우리의 죄와 비참이 결국 또 영원한 멸망이 거울처럼 분명히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먼저 묻노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것을 고백하고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불쾌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에 목마르십니까?

대답: 예”

두 번째 구원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묻는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실 뿐 아니라 공의로우셔서 죄를 벌하시지 않고 그냥 두시지 않으신다.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벌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보냄받아 참된 몸과 영혼을 취하셨고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치루셨다는 것을 요리문답서를 따라 요약한다. 그리고 성만찬의 의미를 다시 요리문답서에 있는 거의 그대로 요약하며 묻고 청중이 예라고 답한다. 세 번째도 같은 방식으로 주 그리스도에게 평생 감사를 표현하면서 시기와 미움을 거절하면서 모든 죄를 미워하면서 살지 묻고 청중이 예라고 답한다. 이렇게 성만찬 준비 토요일에 요리문답서와 요리문답서 요약으로 백성에게 중요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목사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해야할 중요한 일이었다. 
성만찬 예식에서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계속 사용된다. 목사는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는 자기 전에 자신을 살펴야 된다고 권하면서 세 가지를 말해야 하는데, 이 세 가지가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세 부분의 요약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참된 살핌은 세 가지다. 첫째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죄와 망함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스스로 싫어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된다. 왜냐하면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크신데, 그것들을 벌하시지 않고 지나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극심한 고난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살피되 그가 또 이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지 보아야 한다. 곧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때문에만 모든 자신의 죄가 용서되어지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마치 자기의 소유처럼 전가되고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마치 자신이 직접 스스로 직접 모든 자기의 죄값을 치루셨고 모든 의를 성취한 것과 같다. 
셋째, 각자가 자기의 확신을 살필 것은, 앞으로 모든 생애동안 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 것인지, 또 위선 없이 모든 적의와 질투와 미움을 거절하면서, 이후로는 참된 몸과 연합 안에서 이웃과 함께 살기로 진지한 결심을 갖는지이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요약이면서 동시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81문에 나온 주의 만찬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의 확장이다. 81문은 자기 죄를 슬퍼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자기 죄가 사해졌음을 믿는 사람, 믿음이 강해져서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요약과 성만찬에 대한 부분이 예식서에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팔츠의 신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에 있는 복음의 요약을 생각하며, 즉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며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가 사해졌음을 믿으며, 또 감사하면서 더 나은 삶을 살기로 다짐하면서 성찬상에 나아갔다. 
일 년에 다섯 번 통독하는 요리문답서, 매주일 듣는 요리문답서의 요약, 매주일 듣는 적정분량의 해설만이 아니라, 교회생활 전체에서 즉 설교에 스며들어있는 요리문답서의 내용, 세례와 성만찬 등 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그 실제적인 내용을 드러냈다. 따라서 팔츠에 사는 성도들은 요리문답서와 함께 세례받고 자라나서 교육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며, 죽을 때까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와 매일 함께 하며 삶과 죽음에 있어서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만 했다. 그러나 이런 신앙교육의 방식과 열매가 오래 가지 못했다. 1576년 프리드리히 3세의 죽음과 함께 루터주의가 들어와서 7년 동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금지되었다. 1583년 다시 회복되었으나 1622년 로마가톨릭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오랫동안 요리문답서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교육은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했던 이들에 의해 유럽의 다른 지역들 특히 네덜란드에서 꽃피우게 된다. 

확산과 현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초판의 제목은 “선제후 령 팔츠의 교회와 학교에서 실행될 요리문답서 또는 기독교 교육”(Catechismus Oder Christlicher Underricht wie der in Kirchen und Schulen der Churfürstlichen Pfalz getrieben wirdt)이다. 그 후에 팔츠의 수도였던 하이델베르크를 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라 이름이 전해졌다. 즉 이 요리문답서는 본래 팔츠지역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츠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그 세력을 확장해갔다. 
처음엔 여러 반대들이 있었다. 1563년 이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을 벗어난 요리문답서라고 경고했다. 루터파 신학자들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아우크스 신앙고백서 밖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반대의 절정은 1566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회의(Reichstag)에서 있었다. 당시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2세는 새로운 교회법을 포기하고 요리문답서를 취소하라고 명령했다. 그렇지 않으면 프리드리히3세와 팔츠는 제국의 평화 밖에 있을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에게 변명의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의 양심이 오직 한 주만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황제의 명령에 양심이 굴복할 수 없음과 요리문답서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이 감동적인 연설로 그의 호는 ‘경건자’(der Fromme)가 되었고, 개신교 통치자들에 의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록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 안에 머무를 수 있었으나 대다수의 루터주의 진영으로부터 고립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갔다. 가장 큰 이유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신학적 용어보다 주로 성경에서 나오는 보편적 용어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과 언약과 섭리의 신학적 내용들을 포기하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 기독론과 성만찬론에서도 개혁교회에서 가르쳐왔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되 보편적 용어들을 사용했다. 질문의 방식이 ‘너’에게 물음으로써 성경의 내용이 즉 교리가 ‘나’의 문제임을 알게 했다. 신자들이 교회의 고백을 하되 자신의 고백으로 하게 함으로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믿음으로 얻은 복과 영생과 위로가 자신의 것임을 확신케 했다. 마지막으로 전체 내용이 잘 구성되어 논리적으로 연결되면서도 아름다운 운율로 되어 있어서 청소년들이 쉽게 암송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들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독일지역의 개혁교회에 확산되어 가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개혁파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중요한 특징을 지닌 신앙고백서가 되었다.” 독일어판 만이 아니라 라틴어 판도 인쇄되어 퍼져갔다. 라틴어판은 특히 신학연구와 더불어서 확대되어 갔다. 1600년 이후에 라틴어와 헬라어가 나란히 편집된 책이 발견된다. 고전어를 익히기 위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사용된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일반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의 신학해설을 위해서, 학생들의 언어실력을 위해서 사용되며 자기 세력을 계속 확장했다. 
가장 큰 영향은 네덜란드에 끼친 영향이다. 1563년 이미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인쇄되었다. 팔츠지역 프랑켄탈(Frankenthal)이라는 곳에 머물던 네덜란드에서 온 신앙난민들은 자신들의 요리문답서로 받아들였다. 1567년 데벤터(Deventer)의 인쇄소에서 1000권을 안트베르펜(Antwerpen)으로 보냈다. 1568년 베젤(Wesel)에서 네덜란드 신앙난민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네덜란드교회를 위해 필요한 요리문답서로 기대되었다. 1571년 엠덴 회의는 이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1618/19년에 열렸던 도르트(Dordrecht) 총회에서 받아들여졌다. 1619년 5월 1일 오전에 열렸던 147차 모임에서 “이미 전에 네덜란드 교회 안에 받아들여진 팔츠의 요리문답서가 점검되고 검사되어서 각 총대들이 이 요리문답서에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전달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 요리문답서 전체가 읽혀졌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148자 모임에서 외국의 총대들과 네덜란드의 총대들 모두가 “팔츠의 요리문답서 안에 포함된 교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과 거기에 동의가 덜 되어서 바꾸고 교정해야만 할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선언했다. 총대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기독교정통교리의 아주 정확한 개요”(admodum accuratum Orthodoxae doctrinae Christianae compendium)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해서 팔츠의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범유럽개혁교회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계속 번역되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던 네덜란드 사람들, 이들은 왈론파라고 불렸는데 이들을 위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독일지역에서 머물렀는데, 그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독일어와 프랑스어 대조본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1607년에 나왔다. 영역본은 1572년 런던에서 나온 이후 계속 많은 숫자가 출판되었다. 1591년에 에든버러에서 나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왕의 공인을 받은” 요리문답서라고 되어 있다. 1615년에는 교회용으로 지정된 인쇄본이라고 되어 있다. 즉 스코틀랜드에서 교회의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헝가리에서는 1577년 번역출판되고 이후에도 여러분 나오게 되는데, 1607년에 시편송과 함께 요리문답서가 포함되어 있다. 1619년 다뉴부 상부지역 개혁교회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이후 계속 확대되어서 1646년 헝가리 개혁교회 총회에서 각 교회가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이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에서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사용되었다. 
방해가 없던 것은 아니다. 요리문답서는 그것이 오후에 설교되는가 아닌가로 교회에서 요리문답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 성격이 드러났다. 18세기까지 독일 개혁교회는 모든 곳에서 요리문답설교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계몽주의 영향아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설교는 점차 자리를 잃어갔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서 특히 1817년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연합이 여러 곳에서 시작되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설교는 급격히 약화되어 갔다. 
네덜란드에서도 비록 항론파가 교리적 이유에서 요리문답설교를 반대했어도 개혁교회에서는 18세기까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설교가 잘 유지되었다. 이미 1816년 왕정에 의해 주도되어 시작된 교회 체제(Hervormde Kerk)에서 신앙고백서는 그 권위에 금이 갔었다. 그래도 1831년 순차적인 성경강해가 요리문답서를 대체하기를 제안했을 때 거절당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요리문답서는 계속 그 권위를 상실하여 1860년 회의에서 요리문답서설교의 의무는 삭제되었다가 교회의 반발로 다음 해 다시 회복되었다가 1863년 요리문답설교는 목사의 판단에 맡기는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이런 흐름에 반대해서 1834년 소위 분리(Afscheidung)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들(주요교단은 ‘기독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이다)은 요리문답설교가 계속 유지되었다. 1866년 다시 소위 애통(Doleantie)에 의해 시작된 교회들(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에서도 요리문답설교가 유지되었으나 소위 1944년 해방파(Vrijgemaakt)의 분리 이후 급속도록 약화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권위가 약화된 두 개의 개혁교회교단과 루터교회가 2004년 네덜란드 개신교회(Protestantse Kerk in Nederland)로 한 교단을 이뤘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현재가 완전히 바닥인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까지 여전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활용하는 방법이 출판되고 있으며 2004년 다시 인쇄되었다. 독일의 경우 2011년 설문조사한 결과 규칙적으로 매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설교를 해오고 있는 교회가 약 20교회 정도가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매주 45-60분 정도 걸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설교를 듣는 인구가 25만명 정도 된다. 네덜란드개혁교회(해방)(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vrijgemaakt])과 기독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의 경우 교단의 학교가 있어 가정에서 만이 아니라 자녀들이 학교에서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배우며, 주중에 목사에 의해서 요리문답서 교육을 받는다.

나가며: 제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나온 이후 450년이 흘렀다. 시간이 흐름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교회의 소명을 변하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유일한 소명이며 이것이 없다면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따라서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가졌던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라는 소명의식은 이후에 오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을 후대에 전해야 하며,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도록 교육해야 하는 소명은 우리에게 지속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작성자들이나 우리나 “네 자녀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신 6:6-7)는 똑같은 명령이 주어졌다. 
프리드리히 3세가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 즉 “피어나는 청춘들이 학교와 교회에서 기독교 교리를 아주 경솔하게 또는 한편 전혀 가르침을 받지 않거나, 한편 다르게 또는 지속적이고 확실하고 통일적인 요리문답서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과 판단에 따라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는다”는 것은 마치 우리시대를 보는 듯하다. 교리교육의 부재 또는 표준없이 가르치는 교육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 없는 후대를 양성할 것이고,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는 상실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상실했을 때 그들의 인도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것이다. 
이런 예상되는 비극을 바라보면서 교회교육의 초점을 자녀들에게 맞출 것을 제언한다. 팔츠 교회법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위치는 우리에게 바로 그 점을 시사한다. 형식적으로는 긴 분량의 요리문답서가 세례와 성만찬을 갈라 어색함을 드러내지만, 세례받은 자녀들에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전달하면서 양육함으로 성만찬에 참여하게 하려는 그들의 의도가 있다. 우리에게 내려오는 유아세례 서약서에 의하면 부모는 자녀를 “교회 기관에 참석하게 하여 주님의 교훈과 양육을 받으면서 자라게 할 것을” 서약해야 한다. 이것은 다시 신자들의 자녀를 주님의 교훈과 양육을 받도록 해야 할 교회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자녀들에게만 멈추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서문과 팔츠의교회법에 의하면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교회만 참여하지 않는다. 가정과 학교가 함께 참여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전 기관이 참여하기 때문에,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에 팔츠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리라고 내다본다. 교회 전체가 참여하여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초점을 맞출 때 부모들의 신앙을 포함하여 교회 전 세대가 즉 교회전체가 그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다만 네덜란드처럼 교단이 운영하는 학교가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지만, 학교에서 신앙교육의 부재는 숙제로 남는다. 
팔츠교회에서 시도했던 방법들을 암송, 다양한 방식의 반복, 그리고 요리문답서 설교가 지금도 유효할 수 있다. 요리문답서의 암송과 반복은 성경의 내용을 구체화한 것으로서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가며 암송을 통해 배웠을 때, 커서 그들이 믿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는 요리문답서의 의미를 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것이므로 필수적이다.  나아가 요리문답서 설교는 성경이 말하는 내용의 핵심을 한 개인의 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교회의 표준문서를 통해 교회전체가 확인하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바름’과 ‘같음’을 위하여 팔츠교회가 산출한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였듯이, 우리는 교회 신앙고백서를 통해 한 믿음 안에 묶여 있음을 확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교육은 정보로서의 교리적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삶이 되어야 한다. 팔츠의 교육이 요리문답서의 암송을 교육의 방법의 하나로 들여왔을지라도 그 목적은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선한 성품과 생활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추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따라서 그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삶을 사는 자녀를 키우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와 상대주의가 우리 주위에 이미 가장 큰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앞으로 믿음을 위한 더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내용을 기억과 마음에 심어 이 싸움에서 견디며 그들의 정체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책임일 것이다. 

[그림자료: 오트하인리히, 프리드리히3세,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초판 표지, 1563 팔츠 교회법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