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30 19:26
유대주의자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렇게 깊이 그리스도를 안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3년이란 시간을 함께 먹고 마시고 잠을 잤던 제자들 역시도 예수님에 대해서 지극히 일부만을 알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인간의 이성과 생각, 어떤 느낌만으로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그리고 주님 자신을 말씀으로 보여 주신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말씀 속에서 경험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안다는 의미는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 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극히 단편적인, 그리스도에 관해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지식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와 깊은 관계도 아닌 사람이 당신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말하면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끼겠습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서 다 안다고요? 나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요?라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우리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니.. 너는 나에 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리가 주님을,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거만한 착각이 아닐까요..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알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연인들이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했던 그 어떤 대상보다도 더 열렬히 더 간절히 그리스도를 알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을 다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연애를 하는 연인 사이에 서로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만남을 피한다면 일주일에 겨우 한번 그것도 어떨 때는 건너 뛰기 일수라면 그 사랑이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요.. 사랑은 형식을 만들어 내지 않지만 기꺼이 자발적인 구속력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한 존재에게만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종속 당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모든 지식을 흡수하게 됩니다. 사랑은 그를, 그녀를 끊임없이 알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를 주님을 향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주님을 알기 위해 주께로 더욱 다가가려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진 자에게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알고 경험하게 된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3장 8~9절에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다 포기하고 이 전에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자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자,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하는 그 욕망 때문이라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당신의 존재를 통해서, 당신의 존재 안에서 새로운 나를 보고 싶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님, 당신 안에서 나의 존재가, 오늘까지의 나의 삶의 의미가 새롭게 발견되고 다가오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러한 황홀한 영혼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일까요.. 사랑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사랑의 고백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유대주의 종교 지도자들, 자기들의 의로 가득 찬 그들은 메시야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아는 메시야에 관한 지식은 다윗의 자손으로 그분이 오신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어리석은 자들에게 시편 110편 1절을 다윗이 성령을 통해서 고백한 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7절에, ‘다윗 자신이 그를 주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그의 자손이냐 그러자 많은 무리가 그에게 기쁘게 듣고 있었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연구했다고 자부하던 서기관들의 메시야에 대한 지식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실이 전부였지만 정작 다윗은 이미 그 시대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주님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짚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인식했을 뿐, 위대한 다윗 왕조차도 메시야를 자신의 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서기관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한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오해하여 함부로 말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그리스도를 인간들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심각한 죄악을 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이것은 중대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삼위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알고 깨달으며 그리스도를 온전한 우리의 구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메시야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곧 메시야에 대한 불신과 거부와 멸시로 유대주의자들에게서 드러났듯이 하나님의 아들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신앙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해를 인간의 편협한 사상과 철학, 이념의 안경으로 바라보며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메시야를 해석하는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누구이시며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인간의 이성적 관점에서 파악하려 해서는 안 되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 목적을 따라서 올바로 이해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결코 그리스도를 파악될 수 없는 존재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 세상의 지식으로도 하나님의 아들을 올바로 온전히 규정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알고 믿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은혜와 역사를 통해서만 알뿐입니다. 인간의 저열한 사상과 이념의 틀로서만 그리스도를, 개혁파 신학과 사상을 파악하고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기는 모든 자들을 저는 혐오합니다.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갈라디아서 1장 8~9절은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며 다윗의 주가 되심을 주님은 말씀하시면서 다윗이 주라 하는 메시야가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는지를 반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메시야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야에 관한 총체적인 무지를 지적하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곧 메시야에 대한 불신과 외면으로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려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 명쾌한 논리와 지혜를 보십시오. 그분은 진리와 지혜, 그 자체이신 분이셨습니다. 시편을 안다면 메시야는 다윗의 주님이 되신다. 그렇다면 너희도 메시야를, 너희 앞에 있는 나를 주로 믿어야 한다는 이 당위를 주님은 그들에게 깨닫게 하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시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이 논리를 즐겁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도 주님을 메시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6절에 이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산헤드린은 이제 백기 투항을 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논쟁을 통해서 예수의 흠을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두 번 다시 그리스도와 논쟁하지 않게 됩니다.
재미있고 즐겁게 주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지옥에 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설교가 재미있고 즐겁고 감동적입니다. 길지도 않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주일마다 듣는 말씀에서 이 같은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참 믿음으로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될 자는 얼마나 될까요.. 개혁주의의 신학과 정통 교리, 청교도들의 신앙이 아무리 올바르고 귀하며 아름다워도 그것을 믿지 못하면 그것을 지식적으로 즐기기만 할 뿐, 그 치열한 믿음의 좁은 길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으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이것이 제일 염려스럽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개혁주의 신앙에 매력을 느끼고 교리를 좋아하고 바른 신앙과 엄밀한 신앙의 전통을 아무리 좋아하셔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그분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며 기뻐하고 감격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영원한 약속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시고 성경 속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그래서 많은 일을 하고 봉사를 하고 직분을 갖게 되었어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이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오직 그것만이 내 믿음의 진위를 증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